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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서예/방각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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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방각본의 각자체를 통해 당대인의 미적 관점에 있어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체를 알 수 있다.

판하본인 정사본을 필사하는 필사자가 선택한 서체는 이미 방각업자에 의해 제약이 가해진 서체이다. 방각업자가 선호하는 서체는 극히 아름다운 미적인 완성을 이룬 서체가 아니다. 방각업자는 각수가 판목을 제작함에 있어서 <생산성이 높은 서체 곧 생산성이 높은 각자체>를 선호한다. 그러나 무조건 생산성이 높은 각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방각소설은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하나의 상품으로 생산되는 것이기에, 상품의 구매자인 독자의 선호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단 독자가 해독 가능한 서체라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또한 이것은 처음에는 독점적인 상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다른 판본들과 경쟁하면서 판매되는 상품이기 때문에, <독자가 선호하는 서체>라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독자가 선호하는 서체, 이는 당대인의 미적 관점에 있어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서체이며, 이를 우리는 각자체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방각본의 각자체를 논의함에 있어서 구분해야 할 것은 먼저 이것이 초간본인가 아니면 기존의 판본을 번각하여 펴낸 번간본인가 하는 점이다. 다음에는 개간본 중에서 이것이 전체를 개간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개간한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보각이 이루어진 부분을 구분하여 검토해야 한다. 개간본의 경우 개간된 부분은 번각이 아니라는 점에서 초간본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보각된 부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개간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은 이 부분이 방각업자의 노력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방각업자는 가능하다면 한 권을 구성하는 전체 장수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이러한 노력은 한 면에 들어가는 행수를 늘리려는 노력으로, 그리고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수를 늘리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물론 작품의 내용을 축약하거나 누락시키는 것이 가장 손쉬운 것이지만, 이는 각자체와 관련되는 부분이 아니기에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한 면에 가능하다면 많은 글자를 새기려는 방각업자의 태도,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해독 가능한 크기의 글자여야만 한다는 제약, 이 가운데에 자리잡은 것이 방각소설의 한글 각자체라 할 수 있다. 개간본에서 보여주는 각자체는 무엇보다도 시간적 후행성이라는 점에서 각자체의 시기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보각이나 개각된 부분의 각자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대에 있어서 선호하는 이상적인 각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똑바로 앉은 자세로 소설책을 본다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찌보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설책을 본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오락물로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볼 때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는 것처럼, 이들도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설책을 읽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독서를 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는 어떤 자세일까? 이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아닐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방각본의 각자체는 똑바로 보는 각자체라기보다는 비스듬히 보는 각자체라 하겠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현전하는 방각소설, 그 중에서도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간행된 방각소설에 사용된 각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전하는 방각소설 중에는 간기(刊記)가 남아 있는 작품들이 있어서, 방각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1780년의 각자체를 보여주는 것(임경업전 <47장본>)부터 시작하여 1905년의 각자체를 보여 주는 것(정수정전 <16장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물론 모든 자료가 언제 방각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간기를 통하여 방각된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 있고, 이것과의 선후 관계를 따져 간기가 없는 작품들의 방각시기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서 먼저 간기가 남아 있어서 방각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80년 임경업전 <47장본>
1847년 전운치전 <37장본> 1780년 『임경업전』 간행 이후, 1847년 『전운치전』의 간행이 이루어지기까지 방각소설의 간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아니한다. 다만 이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간기를 가진 작품이 보이지 아니하기에 공백기처럼 보일 뿐이다.

-1848년 삼설기 권지삼 <27장본>
-1850년 쌍주기연 <33장본>
-1851년 사씨남정기 권지상 <32장본> 권지하 <34장본>
-옥주호연 <29장본>
-1852년 장경전 <35장본>
-1856년 서유기 권지상 <31장본> 권지하 <28장본>
-1858년 숙향전 권지상 <34장본> 권지하 <30장본>
-장풍운전 <29장본>
-당태종전 <26장본>
-1859년 삼국지 권지삼 <30장본>
-용문전 <25장본>
-1860년 숙영낭자전 <28장본>
-1861년 신미록 <32장본>
-1864년 울지경덕전 <26장본>
-1887년 구운몽 <29장본>
-임장군전 <21장본>
-1890년 임장군전 <20장본>
-1894년 임진록 권지삼 <23장본>
-1905년 정수정전 <16장본>

이들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제목의 작품들 중에서 판본들의 선후 관계를 비교 검토하면 간기를 가진 판본에 선행하는 판본을 확인할 수 있다. 방각 시기가 여기에 제시하는 것보다 앞서는 판본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정확히 그 시기를 못박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이창헌, 『경판방각소설 판본 연구』, 태학사, 2000을 참조할 것.

여기에서는 간기가 있는 판본만을 우선하여, 이들에 사용된 각자체의 특징과 의미를 살피기로 한다. 이들 판본에 사용한 각자체가 방각된 당대를 대표하는 서체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한글로만 판각된 문헌 중에서는 나름대로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방각소설 중에서 간기가 남아 있어서 당대의 각자체를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1) 『임경업전』의 간행 : 1780년
1780년 『임경업전』 간행 이전에 한글로 된 방각소설의 간행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에, 1780년 『임경업전』 간행이 최초의 한글 방각소설 간행이라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인다.
먼저 『임경업전』은 ‘歲庚子孟冬京畿開板’이라는 간기가 있어 1780년에 인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말미에 ‘경업젼을 언문으로 번역고 사람마다 알게 기 동국 츙신의 말이매 혹 만민이라도 다라 본밧게 미라’고 하여 간행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1780년에 인행된 <47장본>이 아니라, 이후에 몇몇 부분을 보각하여 간행한 <45장본>의 일부분이 낙장되어 41장만이 남아 있는 <낙장본> 『임경업전』(엄밀히 말하면 <45장본>의 낙장본이다)이다. <47장본> 『임경업전』이 1780년에 개판(開板)된 이후 여러 차례 보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각자체의 뚜렷한 변모를 보이는 보각 부분은 낙장본의 25번째장([그림 2] 참조) 장차표시는 二十七八로 표시되어 있으며, <47장본>으로 계산하면 제27장과 제28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한 장으로 새긴 것이다.
과 35번째장 장차표시는 四十一二로 표시되어 있으며, <47장본>의 제41장과 제42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한 장으로 새긴 것이다.
이다. 판식의 변모가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47장본> 『임경업전』이 복합판식 제1장부터 제5장까지는 반엽 12행을 기준으로 작성하였고, 제6장 이하는 모두 반엽 13행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복합판식임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복합판식을 지향하는 방각업자를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반엽 12행을 기준으로 작성한 선행본이 존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기에 이에 선행하는 판본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임경업전』의 초기 간행 모습은 제1장부터 제5장까지가 가장 잘 보여 준다 하겠다. ([그림 1] 참조)
여기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필흔을 남긴 채 새기고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자를 하나씩 독립시켜 새기려고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활자본의 경우에는 필흔이 나타나지 않으며, 활자본을 번각한 경우에도 역시 필흔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임경업전은 활자본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흔을 그대로 새긴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필사본 특히 흘림체나 궁서체로 기록한 필사본([그림 32] 참조)의 특성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판하본인 정사본을 작성할 때에 나타난 필흔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각자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기도 한다.
둘째, 각자체의 모양을 살피면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으면서(右肩上向形) 왼쪽으로 비틀어진 느낌을 준다. 곧 정방형이 아닌 마름모형의 각자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자음인 초성보다는 모음인 중성이 더 길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ㅣ’계열 모음뿐만 아니라 ‘ㅡ’계열 모음을 사용한 경우에도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특정한 몇몇 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사용한 각자체 전체의 문제라 하겠다. 이는 서책을 어느 방향에서 읽는가 하는 시선과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즉 비스듬한 자세로 독서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궁서체의 경우는 그 방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그림 32] 참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판각 작업의 편의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각수가 판각 작업을 할 때, 칼날에 힘을 주는 방향이 수직이나 수평 방향보다는 우하에서 좌상 방향으로 힘을 주는 것이 편리하지 아니한가 하는 점이다. 또한 획의 끝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끝을 직각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반달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더 편리하지 아니하였을까? 이런 점들이 결국은 판하본의 필사자가 의도한 서체가 각수에 의해서 변용되어 각자체로 남게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등을 고려하게끔 한다. 특히 『임경업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리문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오리문자’는 앞의 글자가 반복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필사본에서는 오리문자의 사용이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인본에서 오리문자가 사용된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인본으로서는 드물게 방각소설에서 오리문자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각수의 작업 속도를 고려한 결과라 하겠다.

여기에서 또한 판하본을 작성할 때에, 판하본 작성 이후에 이루어질 작업―판각 작업뿐만 아니라 도서의 판매 및 독자의 독서 과정까지를 포함한 모든 과정―을 모두 고려한 상태에서 <판하본에 사용할 서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였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독자층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가령 궁서체를 읽는 독자는 서탁 등을 이용하여 독서를 하는 독자라고 한다면, 방각본을 읽는 독자는 궁서체를 읽는 독자와는 다른 환경에서 독서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각소설의 주된 독자층이 곧 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독서 환경이 궁서체를 읽는 계층(이들이 서책을 비스듬한 자세로 읽지 아니하였다는 증거는 없다)의 독서 환경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들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모음의 경우, ‘ㅣ’계열 모음 가운데 ‘ㅏ’, ‘ㅑ’가 아닌 ‘ㅓ’, ‘ㅕ’의 경우에는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가늘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ㅣ’계열 모음에 사용된 세로획이 가로획에 비하여 항상 짧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ㅡ’계열 모음의 경우, 세로획이 가로획에 비하여 역시 짧기 때문에 세로획이 가늘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나, ‘ㅡ’계열 모음에서는 기본형으로 사용하는 가로획 ‘ㅡ’가 길다보니, ‘ㅡ’의 중간 부분이 가늘어져서 상대적으로 세로획이 가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한글의 선조적 진행 방향이 세로쓰기이면서도 글자 하나 하나의 조합방식은 한자와의 조화를 취하기 위해 모아쓰기를 기본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하나의 글자 안에서 ‘ㅣ’계열 모음이 차지할 수 있는 가로의 폭은, 세로쓰기를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항상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로쓰기가 가장 일반적인 필서 방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행을 가지런히 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로쓰기를 기본적인 진행방향으로 삼는 경우, 글자 하나가 사용할 수 있는 세로의 길이를 임의로 조정하여 사용한다 하더라도 세로 행을 가지런히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글자 하나가 사용할 수 있는 가로의 길이를 임의로 조정하여 사용한다면 세로 행을 가지런히 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약 방각소설이 한글로만 판각되지 아니하고 한자와 함께 판각되었다면 한글의 각자체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방각소설의 각자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한글로만 작성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세로쓰기라는 글자의 선조적 진행 방향이라는 제약 조건이 한 개의 글자가 변하는 방향을 가로로의 팽창을 제한하고 세로로의 팽창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가로쓰기가 일상화된 오늘날의 글자 형태를 어떻게 변용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점과 관련시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제작되었던 <47장본>의 제작시기는 18세기 후반인 1780년이다. 이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보각이 이루어졌을 터인데, 보각의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45장짜리 단행본을 출판하는 것이 가능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 대략적인 시기를 19세기 초엽으로 간주한다. 1860년경에 <27장본> 임장군전이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47장본>을 보각하면서 사용한 각자체의 사용시기는 19세기 전반기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보각한 부분의 각자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임경업전 <47장본>을 보각한 [그림 2]를 보면, 여기에도 필흔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ㅣ’계열 모음 중 ‘ㅓ’와 ‘ㅕ’에서는 가는 가로획을 보여준다. 반면에 각자체의 형태와 기울기는 원래의 각자체가 왼쪽이 낮고 오른쪽이 높은 우견상향형을 보인 것과 비교할 때, 좌우가 모두 평형(左右平肩形)을 이루고 있다. [그림 1]과 비교할 때, 글자의 모양새 역시 동글동글한 느낌을 주어 오히려 궁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서체가 정확히 어느 때에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9세기 전반기에는 보편적인 한글 서체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임경업전』을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는 이후에 간행된 방각소설에 주로 사용되는 각자체와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방각소설 간행 초기의 각자체에서 다음 시기로의 각자체 변모를 설명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보각체의 경우, 한 면에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겠지만, 처음에 사용한 각자체에 비하여 획 하나하나가 가늘어진 느낌을 주어 매우 섬세한 각자체로 보인다 하겠다. 이에 비하여 『임경업전』을 처음 새길 때 사용한 각자체는 두텁다는 점에서 투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웅혼하면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겠다.

2) 19세기 중엽의 각자체
『임경업전』 간행 이후 60여 년이나 지나서 사용된 각자체를 『전운치전』과 『삼설기』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전운치전』([그림3])과 『삼설기』([그림4])의 각자체를 보면, 『임경업전』을 처음 판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그림1])보다는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그림2])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0년에 사용한 후박하면서도 힘찬 느낌의 각자체에서 1847년 및 1848년에 사용한 섬세하면서 미려한 느낌의 각자체로의 전환, 그리고 이 전환 과정에 위치하는 『임경업전』 보각 부분의 각자체를 상정할 수 있다.
이제 『전운치전』과 『삼설기』에 사용된 각자체를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전운치전』은 1847년에 인행된 작품이며, 1848년에 인행된 『삼설기』 <권지삼>([그림4])에 비하면 필흔이 더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나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여 『삼설기』 <권지삼>의 경우는 필흔이 더 많고 연자(連字)형의 각자체가 많이 보인다. 또한 우견상향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물론 『전운치전』 역시 좌저우고라는 점에서 우견상향의 형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임경업전』에 처음 사용한 각자체에 더 가깝다 하겠다. 이같은 우견상향형의 각자체는 이후 방각소설 간행의 기본적인 각자체가 되었다. 물론 『용문전』과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설기』 <권지삼> 이것이 <권지삼>이 아닌 <권지사>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李昶憲, 「단편소설집 <삼설기(三說記)>의 판본에 대한 일 고찰」, 『冠嶽語文硏究』 20, 1995.
을 1848년에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에 앞서 『삼설기』 <권지상>과 <권지이>([그림5] 참조)가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설기』 <권지상> 및 <권지이>의 인행과 『전운치전』의 인행 사이에 어떠한 선후관계가 존재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다만 『삼설기』 <권지삼>의 간기를 근거로 하여, 『전운치전』을 『삼설기』에 사용한 각자체보다 선행하는 각자체로 본 것일 뿐이다.
『삼설기』 <권지상> 및 <권지이>의 각자체([그림5])를 『삼설기』 <권지삼>과 비교할 때, 이들이 서로 다른 각자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지상> 및 <권지이>를 보면 <권지삼>에 비하여 하나 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50년에 간행된 『쌍주기연』([그림6]), 1851년에 간행된 『사씨남정기』([그림7])와 옥주호연([그림9]) 그리고 1852년에 간행된 『장경전』([그림10])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각자체가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임경업전』의 본래 각자체에 비하면 더욱 둥글고 섬세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18세기의 각자체에서 19세기의 각자체로의 변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현전하는 자료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의 방각소설이 19세기에 주로 방각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임경업전』의 초간본 각자체가 매우 예외적인 각자체이라 하겠으며, 오히려 『임경업전』을 보각할 때에 사용한 각자체가 19세기에 가장 보편화된 각자체의 선행 형태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사씨남정기』의 보각에 사용한 각자체이다.([그림8] 참조) 여기에는 본래의 행문을 축약하여 보각해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지만, 『사씨남정기』를 처음 간행할 때 사용한 각자체에 비하여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의 형태를 벗어나 좌우평견형의 형태를 보여주며, 섬세함보다는 두텁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현상은 『장경전』의 보각체([그림11])뿐만 아니라 『숙향전』의 보각체([그림14])에서도 나타난다. 이들 보각 부분은 모두, 처음 이들이 판각된 1852년(『장경전』)과 1858년(『숙향전』)보다 뒤에 나타난 각자체라는 점에서, 19세기 후반기로 진행하면서 나타날 각자체의 변모를 어느 정도 보여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1856년에 방각된 서유기([그림12])에는 필흔이 많이 나타나면서 연자(連字) 형태의 각자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64년 간행의 『울지경덕전』([그림22])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1861년 간행의 『신미록』([그림21])도 이와 유사하다 하겠다.
이러한 연자형(連字形)의 각자체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리 모든 글자를 독립시키려는 흐름도 있으니,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59년에 간행한 『용문전』 <25장본>이다. ([그림19]) 『용문전』의 경우, ‘己未石橋新刊’이라는 간기가 남아 있는 <25장본>보다 선행하는 <36장본> 『용문전』을 살필 수 있는데, <36장본>의 상한선은 1794년이고 하한선은 1859년이다. 이창헌, 『경판방각소설 판본 연구』, 태학사, 2000, 206-220면 및 538면.
『용문전』 <36장본>의 각자체가 주는 느낌은 『임경업전』을 처음 간행할 때 사용한 각자체와 보각할 때 사용한 각자체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각자체라는 느낌을 주지지만, 『용문전』 <36장본>의 정확한 간행 시기를 알 수 없기에 더 이상의 논의는 멈추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용문전』 <25장본>([그림19])이 보여 주는 글자의 배열 형태, 곧 활자본과 유사한 배열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문전』 <25장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예시한 자료는 간기가 있는 <25장본>이며, 이는 간기가 없는 <25장본>과 번각관계에 있다.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정확한 것을 말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간기가 없는 <25장본>이 선행하고 이를 번각한 것이 간기가 있는 <25장본>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방각소설들은 매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은 모습(字數不定)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를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갖는 ‘ㅣ’모음 계열과 ‘ㅡ’모음 계열의 변별성을 높이려는 의지, 그리고 세로쓰기라는 선조적 진행 방향과 관련하여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비해 용문전 <25장본>은 매 행 일정자(여기에서는 매 행 25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을 『진대방전』에 첨부된 내훈제사 및 내훈, 그리고 『홍길동전』 <24장본>의 제1장 및 제2장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 제1장 및 제2장은 필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문전』과는 다르다. 그러나 『홍길동전』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한 군데의 예외는 있으나 자수일정자(반엽 14행 매 행 20자)를 의식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용문전』 <25장본>처럼 가로 세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지는 아니하다. 『홍길동전』 <24장본>의 경우, 제3장부터는 각자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제1장 및 제2장과 유사한 모습을 제20장까지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미 자수일정자를 포기하고 판면을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용문전』 <25장본>에 사용한 각자체 역시 좌저우고 곧 우견상향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의 방각소설에 사용한 각자체와 비교한다면 좌우평견형에 가까운 각자체라고 하겠다. 또한 특이한 점은 받침으로 쓴 ‘ㄹ’을 흘림체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며, 이 점에 있어서 후대에 간행된 초기 활판본의 자체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하겠다.
이는 결국 19세기 중반기에 이미 필흔을 많이 가진 각자체를 지향하는 흐름뿐만 아니라 활자본처럼 필흔을 전혀 남기지 않는 각자체를 지향하는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방각소설의 주류를 차지하는 각자체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의 필흔을 남기면서 하나하나의 글자를 구분하여 쓰려는 의식이 강한 각자체이며,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각자체로 사용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는 차라리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용문전』이 보여준 것처럼, 받침 ‘ㄹ’의 형태를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처리하는 모습은 이전의 자료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문전』처럼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사용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ㄹ’을 흘림체로 쓰지 않으려는 노력은 1860년에 간행한 『숙영낭자전』([그림20])에서도 나타난다. 『숙영낭자전』에서도 종종 흘림체로 쓴 ‘ㄹ’이 나타나고는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받침 ‘ㄹ’을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쓰려는 노력이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글자들을 연서하거나 글자 안에서 획들을 연획하는 것보다 이들 획이나 자들을 구분하여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습은 곧 판각 작업의 편의성보다 독자의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방각업자의 노력을 보여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3) 19세기 말엽의 각자체
이러한 변화는 결국 필흔을 가능한 한 적게 남기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구분하여 새기고, 우견상향형의 형태보다는 좌우평견형의 형태로 새기는 것이 바람직한 각자체라는 인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1887년에 간행한 『임장군전』([그림25])과 1890년에 간행한 『임장군전』([그림26])이다. 물론 이들이 완전한 좌우평견형의 각자체를 취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견상향형의 모습을 간직하고는 있으나 연획이나 연자의 빈도가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식 연활자(예수교 성경활자나 박문국 연활자 등)의 도입으로 인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근대식 연활자의 도입과 이를 통한 새로운 서체의 보급은 결국 방각소설의 서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임진록에 사용한 각자체이다.

1894년에 간행한 『임진록』 <권지삼>([그림27])을 보면, 글자와 획을 구분하여 새기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 계열의 글자 형태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흘림체가 아닌 정자체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각자체의 모양도 우견상향형이 아닌 좌우평견형의 모양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록』 <권지삼>에 앞선 간행된 『임진록』 <권지상>이나 『임진록』 <권지이>의 경우([그림28])도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권지상>보다는 <권지이>가, <권지이>보다는 <권지삼>이 좌우평견형의 각자체에 접근하고 있으며, 글자나 획 또한 이를 더 구분하여 새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가독성을 높이려는 작업이며, 아울러 당대의 이상적인 서체로 어떤 서체를 지향하고 있었는지를 암시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흘림체보다는 정자체를 기본적인 각자체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수를 더 많게 한다고 하여 이전의 각자체처럼 가독성에 문제를 가져오지는 아니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자료는 1905년에 간행한 『정수정전』([그림29])이다. 이는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새로운 소설을 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비록 좌우평견체에 가까운 형태의 각자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열의 각자체로 이전의 흘림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임진록』이 보여 준 ‘’계열과는 달리 이전의 흘림체 ‘’계열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과거의 각자체가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체의 변화 그리고 각자체의 변화가 더디다는 것을 보여 주며, 한 시대에 여러 종류의 서체가 항상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근대식 활판 인쇄술이 보편화된 1920년대에도 여전히 한남서림 李昶憲, 「한남서림 간행 경판방각소설 연구」, 『韓國文化』 21, 1998.
을 비롯한 여러 서점에서 방각소설을 인출하여 판매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 방각소설의 각자체([그림30] 및 [그림31])가 단순히 호고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당대에 수용된 각자체가 결코 아니며, 이들 각자체에 익숙한 독자들이 여전히 상존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서체가 등장하였다 하여 기존의 서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새로운 서체가 등장하여 주류를 차지하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끝으로 방각소설에 사용한 각자체는 비록 아니지만 방각소설이 활발하게 간행되던 19세기 중엽의 서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 『太上感應篇圖說諺解』(1852년)의 각자체([그림33])를 소개한다. 洪允杓, 『國語史 文獻資料 硏究 (近代篇Ⅰ)』, 太學社, 1993, 421-438면.
이는 앞부분에 한문 원문을 수록하고 이어서 한글로 언해하는 형식으로 계속되는 서책으로, 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이다. 이 중에서 한글로 언해한 부분만을 살펴보면 방각소설처럼 필흔을 함께 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자(漢字)를 수록한 부분에서는 매 행 22자라는 형식을 고수함에 비하여 한글을 수록한 부분에서는 매 행 17자 내외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7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어떤 때에는 16자를 한 행에 수록하고 어떤 때에는 18자를 한 행에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크기의 한글 각자체라는 형식을 깨뜨린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한자는 매 행 22자의 크기로 사용하고 있음에 비하여 한글은 매 행 17자 내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한자와 한글의 크기에 있어서 일대일 대응이라는 격식도 깨뜨린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필흔을 함께 새기는 한글 각자체라는 점에서 본다면, 한글을 판각함에 있어서 필흔을 함께 새기는 현상이 유독 방각소설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오히려 이는 19세기 중엽에 필흔을 함께 새기는 각자체가 당대의 주류를 형성한 각자체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까지를 가능하게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자료들을 계속 찾아내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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