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언급한 한글의 사용 방식과 서체는 모두 세로쓰기라는 일정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글을 쓰기 위한 도구에 있어서 그 기본을 이루는 것은
붓[筆]과 종이라고 하겠다.
한글이 인위적으로 창제되기 이전에 사용하였던 보편적인 기록은 한자(漢字)로
쓰기였으며, 그것도 세로쓰기라 하겠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의 서체이다.
물론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장방형의 서체가 나타나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만드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자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한자와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한글의
외형적 형태를 한자와 같은 정방형의 서체를 취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제약이었다.
한자가 주(主)가 되고 한글이 종(從)이 되는 문자 사용 방식을 취하건,
혹은 한글이 주(主)가 되고 한자가 종(從)이 되는 문자 사용 방식을 취하건,
어느 경우에나 한글은 한자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한자와 한글을 인행하기 위해서 활자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서책을
조판하고
인행한다 하더라도, 어느 경우에나 한글 활자가 지닐 수
있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는 한자 활자가 지니는 서체의 외형적 형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 만들어진 한글 활자를 이용하여 순수한 한글
서책을 인행한다 하더라도 서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이는 한자 서책의 인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이러한 제약 특히 장방형 서체라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글로만 글쓰기라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가 공식적인 글쓰기를
한 경우는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이다. (그것도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만)
한글로만 글쓰기라는 작업은 결국 공적인 영역이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언간(편지) 쓰기라고 하겠으며, 이것 역시 세로쓰기
작업이다. 그러나 이는 출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표준이
될 수 있는 언간을 출판한 경우는 있다) 세로쓰기를 붓으로 한다는 것은
붓이 지니고 있는 특성인 필흔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따라서 한자와 같이 쓰는 한글이라는 인본의 경향성을 따르면, 필흔이 없는
정서한 한글 언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숙종의 언간이다.
그러나 이는 서사의 속도라는 점에서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식이 곧 필흔을 그대로 노출하는 한글 쓰기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인현왕후나 인선왕후의 언간이다. 그러나 한글은 모아쓰기라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ㅡ’모음 계열의 글자를 쓸 때에는 글자의 가독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가독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정방형의 한글 서체
대신에 장방형의 한글 서체를 등장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글
서체는 한자 서체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서체를 형성해 갈 수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쓰기 문화라는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 현상이다. 쓰기
문화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이를 인쇄 문화라는 영역에까지 확대시킨 것이 바로
방각본의 한글 서체이다.
방각본의 한글 서체가 모두 장방형의 서체로만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방형의 서체로 이루어진 방각소설(앞서 검토한 『용문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한글로만 쓰기
문화를 거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에 인쇄된 활자본이 지니고 있었던 전통
곧 활자인쇄본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한 결과 나타난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방각본의 한글 서체는 또한 각수가 판목을 가공하는 과정에서의 편의성을 고려한
서체이다. 서체가 지닌 미적인 특성을 추구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서체로의
발달을 생각할 수 있으나 한글로 쓰기라는 점에서는 이것이 가능하겠지만,
한글로 인쇄하기라는 점에서 곧 상품으로서 소설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각수의 판각 작업에 용이한 서체로서
간결성이 구비된 서체라는 요소를 만족시켜야 하였다.
또한 상품인 소설책을 구매하는 소비자 곧 독자의 서체에 대한 선호도를 고려해야만
하였다. 이는 곧 가독성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방각업자의 입장에서는 인쇄할
한 면에 많은 분량의 내용을 수록함으로써 인행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종이값을 절약하여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 결과 독자의
가독성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방각소설의 글자 크기의 조절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는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방각소설의 서체는, 앞서 언급한 한글만을 사용한 쓰기 문화로부터
한글만을 사용한 인쇄 문화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세월은 바뀌어 새로운 문화 곧 가로쓰기가 등장하여 세로쓰기를 대신하고
있다. 가로쓰기는 결국 서체에 있어서 세로의 크기 곧 글자의 높이에 제한을
둘 수밖에 없다. 세로쓰기에서는 주로 글자의 가로의 크기 곧 글자의 폭이
제한을 받고 높이에 있어서는 큰 제한이 없는 경우라 하겠는데, 이 점에서
본다면 세로쓰기는 결국 ‘ㅡ’모음 계열의 글자에 변별력을 높일 수 있었다는
장점을 지닌 방식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로쓰기가 보편화되면서 글자의 폭에는 큰 제한이 없는 반면에 글자의
높이에는 제한을 둘 수밖에 없다. 글자의 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은 ‘ㅣ’모음
계열의 변별력을 높이는 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아니한다. 즉 불필요한
자유로움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세로폭의 확대에 의한 ‘ㅡ’모음
계열의 변별력을 높이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가로쓰기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선조적 진행 방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있다. 정방형의 서체를 버리고 장방형의 서체를 선택하는 것이 어찌
보면 대안이 될 수 있다 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새로운 기계문명은 장방형의 서체를 사용함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다만 이러한 장방형의 서체에 얼마나 빨리 익숙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