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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고공답주인가
한명국
(일반인용) 조선 선조 때 이원익(李元翼, 1547 ~ 1634)이 지은 총 86구의 가사로, 허전(許傳)의 ‘고공가(雇工歌)’에 대한 답가다. ‘고공답가(雇工答歌)’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전민(田民)을 거느린 주종(主從)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국사(國事)는 돌보지 않고 붕당싸움에만 열중하고 있는 실정을 개탄하고 풍자하였다. 주인을 위하여 종(머슴)들이 먼저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뒤에는 주인이 집안을 바로 잡으려면 하인(종)들을 휘어잡아야 하며, 종들을 휘어잡으려면 상벌을 분명히 해야 하고, 상벌을 공명히 하려면 어른 종을 믿어야 한다는 국왕(선조)에 대한 풍간으로 되어 있으며, 표현 방법은 철저한 풍유로 이루어져 있다 ‘고공가’에 답하는 노래답게 제재와 주제, 문체 등에서 상응하는 수법을 택하여 노래하였다. 그러나 ‘고공가’는 나라가 기운 원인을 단순히 신하들의 직무태만으로 본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사태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왕이 신하들의 충간(忠諫)을 들어 준다면 국운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의적인 표현방법을 써서 나타내고 있는 점이 다르다. (한명국) (전문가용) 조선 중기에 이원익(李元翼, 1547 ~ 1634)이 지은 가사로, 허전(許唆)이 지은 ‘고공가’에 화답한 작품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명신이던 이 원익이 지었다 하며, 순조 때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잡가(雜歌)』라는 노래책에 실려 전한다. ‘목동문답가(牧童問答歌)’, ‘만언사(萬言詞)’, ‘사녀승가(思女僧歌)’ 등과 함께 문답가 계열의 가사에 해당된다. ‘고공가’에 화답하는 노래답게 비유적인 표현방법을 주로 썼으며, 제재와 주제, 문체와 기교 등에서도 상응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 국가의 살림살이(체제와 형편)를 농사짓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에게 왜 ‘마누라’의 말씀을 듣지 않느냐고 비난하고, 이어서 ‘마누라’에게는 ‘어른 종’을 믿으라는 요지를 담고 있다.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은 나라 일에 태만한 신하들을 빗댄 것이고, ‘마누라’는 선조를, ‘어른 종’은 작자 자신을 포함한 당대의 고관들을 빗댄 것이다. 즉, 조선의 백성이 천하에 으뜸인데, ‘드난 종(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신하들)’이 텃밭을 묵혀놓은 채, 밥만 먹고 정자 아래서 낮잠만 자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태만함을 꾸짖는다. 그리고 ‘소먹이는 아이들(지방관청의 이속들)’이 ‘마름(지방관청의 수령들)’을 능욕하니 한 집(나라)의 숱한 일들을 할 자가 없게 되고, 따라서 곡식창고는 비게 되고 세간은 흩어지고 살림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곧 나라 형편이 궁핍하게 된 현실을 한탄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외별감’ 등(변방을 지키는 무관들)마저 맡은 임무에는 소홀하고 제 몸만 사리고 있으니 누가 힘써 나라를 방어할 것이며, 임진왜란의 상처로 크게 기운 집주인, 곧 선조는 밤낮 근심 속에 ���할 날이 없는 것이다. 이는 ‘헤아림 없는 종’ 곧 몰지각한 신하들 탓도 있겠지만, ‘마누라’ 곧 임금님 탓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집안 일(나라 일)’을 고치려거든 ‘종(신하)’들을 휘어잡아 상벌을 밝히고, ‘어른 종(작자를 포함한 정승·판서 등)’을 믿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가도(家道)’ 곧 나라의 형편과 도리가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는 충언(忠言)을 담은 것이다. ‘고공가’에는 나라가 기운 원인을 신하들의 직무태만으로 단순하게 보았으나, 이 작품은 사태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한 다음, 신하들의 충간(忠諫)만 들어준다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 이원익(李元翼, 1547(명종 2) ~ 1634(인조 12))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 전주이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절사를 따라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 정언(正言) · 예조정랑(禮曹正郞) ·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87년(선조 20)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기민을 구호하고 생업을 안정시켰으며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후 임진왜란 전까지 대사헌 ·호조 및 예조 판서를 지냈다.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에 호종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595년 우의정에 올라 진주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 은퇴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을 지내면서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광해군 9) 풀려나왔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 때는 80세의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끝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고, 불합리한 조세(租稅) 제도를 시정, 국민의 부담을 덜었으며,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군병방수제도(軍兵防水制度)를 개혁하여, 1년에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화시켰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고,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 『속 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한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