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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발전 운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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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945-1954:
광복 직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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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국권이 회복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 중지되었던 한글 운동이
다시 일어난다. 광복 이후 국어 생활에서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식민시대에 사용되어
오던 일본어의 잔재 청산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던 한자어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었다. 아울러 한글의 보급 및 문맹자들을 퇴치하는 운동이 각계에서
다각도로 전개되어 국어의 정화에 온 겨레가 힘을 결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1) 한글만 쓰기 운동(1945년)1945년 8월 미 군정청 학무국의 조선
교육 심의회에서는 교과서에 사용되는 문자는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만 쓰기로
결정한다. 이후 한글 전용주의자와 한자 폐지 반대론자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한글 전용이란 ‘學校, 飛行機’라고 쓸 것을 ‘학교, 비행기’로
적자는 주장인데, 이러한 한자 폐지를 한자어 폐지로 오인하여 한때 한글 전용주의자들의
주장은 ‘학교’를 ‘배움집’,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바꾸자는 것이라는
오해까지 얻게 된다.
이후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글 전용 운동은 1948년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에서 비롯된 정부 공문서의 한글 전용을 시발점으로 하여 더욱 확대된다.
이후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찬반 논쟁이 엇갈리는 와중에서도 한글
전용론의 주장은 마침내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도서에까지 미치게 되고 각종 언론
매체에도 점차로 확대된다.
(2) 한글 가로 풀어 쓰기(1945년)
1945년 조선 교육 심의회에서 한글을 풀어서 쓰자는 풀어쓰기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가로 쓰기를 제안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라 하여 풀어쓰기는 보류하고
가로 쓰기만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풀어쓰기 방안이
제안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현배(1947)의 ‘글자의 혁명’이다.
(3) 국어정화촉진운동(1947년)
미 군정청 문교부에서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뜻있게 맞이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국어정화촉진운동’을 전개하도록 한다. 이 운동은 여러 자치 단체를
총동원하여 자발적인 촉진 운동을 전개하도록 한 것이며, 그 방법은 강습회나
강연회 개최, 학교나 관공서의 공문이나 발표문을 더 한층 바른 글로 적기 등이었다.
(4)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1948년)
광복 직후부터 부르짖었던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은 1947년 1월에는 미군정청의
문교부에 ‘국어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일상 용어의 심의를 맡게 하고, 학술
용어 제정 위원회를 두어 전문 용어를 심의하게 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1948년
6월에는 팜플렛 형태의 ‘우리말 도로찾기’ 모음집을 발간하여 전국에 배포하는데,
우리말 도로 찾기의 방침은 다음과 같다.
ㄱ) 우리말이 있는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ㄴ) 우리말이 없는 것은, 옛말에라도 찾아보아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그 뜻을
새로 정해 쓴다.
ㄷ) 옛말에도 없는 말은 다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얻어 새 말을 만들어 쓴다.
ㄹ) 일어식 한자어를 버리고 우리가 전부터 써오던 한자어를 쓴다.
(ㄴ)의 예가 성공한 것은 ‘도시락’이고
(ㄷ)이 성공한 것은 ‘단팥죽, 메밀국수, 통조림, 튀김, 꼬치, 전골’ 등이며,
(ㄹ)은 ‘귀중(貴中), 우표’ 등과 같은 것이다.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은
일본어에 대한 국어 순화와 본래어의 부활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한자어의 제거와
신어창조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글학회, 진단학회,
그리고 한글 전용 촉진회는 3자 공동으로 1949년 한글날부터 일본식 간판
일소 운동을 벌이고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5) 문맹 퇴치 사업(1950년)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동화정책으로 한국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해서,
광복을 맞을 때 인구의 78%가 문맹이었다. 미 군정청은 내부에 문맹퇴치를
관장할 부서를 두어 ‘성인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성인 교육사를 양성하였다.
또한 ‘국문 강습소’를 설치 운영하고, ‘공민학교’를 설치 운영하는 등의 정책을
통하여 3년 동안 약 250만 명의 문맹자를 교육하여 78%의 문맹률을 1948년
정부 수립시 약 41.3%로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일반 사회의 문맹
퇴치 5개년 계획이 끝난 1958년에는 문맹률이 약 4.1%로 낮아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6) 한글간이화 방안(1954년)
1949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현행 한글맞춤법의 까다롭고 어려운
점을 지적, 발표한 담화문이 이른바 ‘한글파동’의 동기가 되었다. 담화문에서는
한글을 3개 조항으로 간이화할 것을 결정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받침은 끝소리에서 발음되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 ㄺ,
ㄻ, ㄼ’ 10개만을 허용한다.
ㄴ) 명사나 어간이 다른 말과 어울려서 딴 독립된 말이 되거나 뜻이 변할 때에
그 어원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
ㄷ) 종래 인정되어 쓰이던 표준말 가운데 이미 쓰이지 않거나 또는 말이 바뀌어진
것은 그 변천된 대로 적는다
그 뒤 이 문제가 정식으로 국무회의에 상정되어 1953년 4월 ‘현행 철자법
폐지와 구식 기음법 사용’이라는 국무총리 훈령이 공포되자 학술단체에서는 반대성명을
내고 국회에서도 논란이 일어나는 등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교부와 공보처는
이에 개의치 않고 1954년 7월 ‘표기법 간소화 공동안’을 정식 발표하였다.
1년 반에 걸쳐 혼미를 거듭하다가,드디어 1955년 9월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철회로 파란 많던 한글파동은 끝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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