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손님들은 식단표의 음식 이름들을
큰 소리로 한 번씩 읽어 보고 뜻을 알아챈 뒤 재미있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지식한 일부 손님들은 “한자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는 엉뚱한 지적을 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한자 실력이 떨어지는 요즘 젊은이들은 아예 읽지 못하는 음식
이름도 있다고 한다. “저건 뭔지 모르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 저것 주세요”라고
하면서 읽지도 못하는 음식을 주문하는 젊은이도 있다나.
이두식 표기는 기업의 신제품에도 등장하고 있다. L제과에서 내놓은 아이스크림은
‘설레임’(雪來淋)이라는 상품명으로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이 역시
‘이두식’ 표현으로 아이스크림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다. ‘설레임’을
한자로 적당히 적은 ‘설래임’(雪來淋)은 ‘눈 설’(雪), ‘올 래’(來),
‘방울져 떨어질 임’(淋)을 결합한 것이다. ‘설래임’(雪來淋)은 눈이
와서 녹아 물방울져 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녹아내리는
것이, 차가운 눈이 녹아 물방울로 뚝뚝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뜻으로
보니 아이스크림 상품 이름으로 ‘설래임’(雪來淋)은 참 그럴 듯하다.
이밖에도 상당수 술집이나 카페 등에서 변소의 영문 표현인 WC를 ‘多不有息’(다불유식)이라고
표지판을 붙여 놓는 등 참신한(?) 이두식 표기가 생활의 여러 분야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이 신문 기사는 예스러운 이두식 표현이 현대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재미를
선사하고 있으며, 이런 까닭에 음식 이름이나 상품 이름에 한자의 뜻과 음을
이용한 방식이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위 기사에서
신라 때 설총이 이두를 창안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과장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설총이 우리말로 아홉 가지 유교 경전을 풀이했다고
되어 있다. 이 때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이두일 것이다.
그런데 이두식 표기는 설총 이전의 금석문에 이미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두를
설총이 ‘창안’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설총 이후에 이두식 표기법이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우리말 표기가 가능한 방법으로 발달한 사실로 보아, 설총이
기존의 이두를 대폭 발전시켜 집대성한 것이라 생각된다.
위 기사에 나온 음식 이름의 한자 표기는, 좁은 의미로 볼 때 이두가
아니라 군두목에 해당한다. 이두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쓸 때는 한자 차용
표기법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의 이두는 기록을 위한 문서 작성 시
한문을 기본으로 하고 우리말 어휘 요소와 문법 요소 일부를 한자를 빌려
적은 방법을 뜻한다. ‘더욱 : 加于’, ‘곳곳 : 庫庫’, ‘짐즛 :
故只’, ‘이다하얏거늘 : 是如爲良在乙’, ‘-을랑 : 乙良’, ‘-거든
: 去等’ 등 많은 이두식 표기가 문헌에 존재한다. 현대의 우리말 중에도
이두 어휘에서 비롯된 단어가 아직 쓰이고 있는 것이 있다. ‘도지’(賭地)는
집이나 땅을 빌려 쓸 때 주는 대가인데 이두식 한자어에서 온 것이다. ‘마감’(磨勘),
“물고를 낸다”고 할 때의 ‘물고’(物故, 사고로 사람이 죽음), ‘물주’(物主,
소유주), ‘봉족’(奉足, 곁에서 도와 줌) 등 이두에서 온 말이 일상어화한
것은 그 수가 적지 않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다름이 아니라’라는 표현
역시 이두 문서에 자주 쓰인 ‘無他’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어서 그 기원이
이두에 있다.
한편 ‘군두목’이라는 것은 이두(吏讀)와 비슷하나, 한자의 뜻과 음을
일정한 체계 없이 무차별하게 이용하여 적는 표기법이다. ‘지갑’(紙匣)을
‘地甲’(지갑)으로, ‘괭이’를 ‘廣耳’(광이)로 적는 식이다. 제주도의
무당 노래를 수집해 놓은《풍속무음》(風俗巫音)(제주대학교, 1994)에
노랫말을 향찰식 표기와 군두목식 표기를 섞어서 적은 예가 수없이 나온다.
천년 살 집 지어 사는 千年生屋 造居何隱
하늘로 내린 물 天午路下限水 (상권 39쪽)
산오로 흘어 내린 물 山午路流下限水 (상권 39쪽)
개 고양이 손 시슨 물 狗猫手洗限水 (상권 40쪽)
쌀 주명 물 주명 멀리 모라 내자 米授命 水授命 遠伊 驅出何者 (상권 47쪽)
왕으로 하시오 하니 王午路何是要何尼 (상권 249쪽)
20세기에 수집한 제주도 무가(巫歌)에 이두와 향찰식 표기 및 군두목식
표기가 뒤섞인 우리말 가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이 곧 현대의 음식점
차림표나 상표 이름에서 되살아난 것이 위에서 본 신문 기사요 상품 이름이다.
전통적 차자 표기의 끈질긴 생명력과 잠재력을 보여 주는 예라 아니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