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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문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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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어를 기록하고 사상을 교류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온 한자는 우리의 언어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원전 2-3세기 경 중국에서 전래된 한자는 조선조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까지 우리말을 기록하는 수단이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글과 함께 공용문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실생활에도 여전히 많은 한자가 사용되고 있다. 현재 우리말을 구성하고 있는 16만여 개의 어휘 중 한자어가 약 70%에 달한다는 사실도 한자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차지하는 높은 비중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우리가 한글만 가지고서도 우리말을 기록하고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말에는 이렇게 많은 한자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바로 우리말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한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어, 한자가 중국의 문자라는 사실을 뛰어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공용 문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따라서 한자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말의 올바른 이해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도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의 탄생
창힐 상
그림1 : 창힐 상
黃帝의 史官이었다는 설도 있고 고대의 帝王이었다는 설도 있다. 4-6 개의 눈을 가지고 천문지리, 동식물 등을 관찰한 것을 근거로 하여 한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출토된 상고시대의 문물을 살펴보면 한자는 기원전 3000년 이전 신석기시대에 이미 탄생되었다. 전국(戰國) 시기에 한자는 창힐(倉頡)이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나왔다. 그런데 창힐이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여,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다고도 하고, 고대의 제왕(帝王)이었다고도 하고, 일반 평민이었다고도 한다. 창힐이 어떠한 사람이었든 그가 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단지 전설일 뿐 믿을 만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한자는 어느 한 개인이 혼자서 어느 한 시기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자는 그 사용하는 사회의 전체 구성원의 공통된 약속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야 한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어느 한 개인이 그 많은 수의 한자를 만들어 전체 구성원들의 약속을 얻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설사 창힐이 실존인물이 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 혼자서 한자를 만들었다기보다 는 한자를 정리하는 과정에 참여한 인물 정도로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자가 처음 생겨난 시기는 아직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자는 상대(商代) 갑골(甲骨)에 새겨지고 청동기에 주조된 문자이다. 한자가 그림(圖畵)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갑골에 새겨진 문자는 그리는 단계가 아닌 쓰는 단계로 이미 발달한 문자라 할 수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문자가 그리는 단계에서 쓰는 단계로 발전하는 데에는 적어도 30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리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1950년대 이후 앙소(仰韶)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각획부호(刻劃符號)대문구(大汶口)문화의 도형부호(圖形符號)에 대하여 연구를 한 결과 최초로 문자가 탄생된 시대는 분명 상대(商代)보다 훨씬 이전인 하(夏)왕조나 혹은 하대(夏代)보다도 더 이른 시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4, 5천년이상 된 신석기 시대가 된다.
 
상대(商代)는 노예사회시대로 이미 궁실과 성곽이 있고, 농업이 있고, 그릇을 제조하고, 제련하는 등의 수공업이 있었다.
 
腹甲에 새겨진 갑골문
그림2:腹甲에 새겨진 갑골문
상(商)왕조는 점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대개 제사, 정벌, 전렵, 농사 등 모든 일에 점을 쳤다. 점을 친 결과는 주로 거북이 배 껍질(腹甲)에 새겨 기록하였고, 때로는 소 어깨뼈(牛肩胛骨)에 새기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짐승의 두개골(頭蓋骨)에 새기기도 하였다. 갑골은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서북오리(西北五里) 소둔촌(少屯村)에서 일찍이 수당대(隋唐代)부터 발견되기 시작하였으나, 무늬 모양이 새겨진 갑골을 본 그 지역 사람들은 이를 ‘용의 뼈(龍骨)’라 여겨 이것을 가지고 약재를 만들어 약방에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청(淸) 광서(光緖) 25년(1899)에 이르러서야 국자감에서 금문(金文) 연구에 종사하던 왕의영(王懿榮)이란 학자에 의해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학질에 걸려 한약방에 한약을 지으러 갔다가 약재로 쓰이는 용골 위에 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이들 문자가 자신이 연구하고 있던 금석문(金石文)보다 이전의 문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안양현(安陽縣) 서북오리(西北五里) 소둔촌(小屯村)은 원래 은상(殷商)의 옛 도읍이 있었던 곳이다. 1928년 이후 몇 차례 발굴을 거쳐 은 갑골은 10만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상(商)왕조 후반 반경(盤庚)이 엄(奄)에서 은(殷)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부터 폭군(暴君)으로 알려진 상대(商代)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 이르기까지 약 273년 간 사용되었던 것으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3~11세기이다. 갑골에 새겨진 문자를 갑골문이라고 부른다.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한자가 탄생된 가장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신화단계에 있었던 은상(殷商)왕조의 실체를 밝히는 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소뼈에 새겨진 갑골문
그림3:소뼈에 새겨진 갑골문
사슴의 두개골에 새겨진 갑골문
그림4:사슴의 두개골에 새겨진 갑골문
   
 
갑골에 새겨진 글은 대부분 상(商)나라 왕실에서 조상신, 자연신의 생각을 묻기 위해 점을 친 내용, 점을 친 날짜, 점을 친 사람, 점괘에 대한 판단, 점괘가 실제로 맞았는지의 여부 등을 기록한 것이며, 일부분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점친 내용
   
점친 내용:   癸卯卜: 今日雨?
  其自西來雨?
其自東來雨?
其自北來雨?
其自南來雨?
   
 
현재까지 모두 16만여 편(片)의 갑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10만여 편(片)에 문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거기에 새겨진 총 4,600여 자 중 2,000여 자는 해독이 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미 해독된 글자에서 보면 한자가 그림에서 발전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림에서 필획이 간단한 문자로 변했고, 필획이 간단한 문자에서 진일보하여 새로운 문자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은 이미 매우 발달한 문자이기는 하지만 갑골문에는 그림형태의 문자도 여전히 많다. 대체로 형체가 있어 그릴 수 있는 실물은 대부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상형자1
 
위의 글자들이 나타내는 것은 모두 형체가 있어 그릴 수 있는 실물이다. 이러한 문자를 상형자(象形字)라고 한다. 이러한 글자는 비록 아직 그림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미 단어를 나타내는 문자가 되었다. 필획은 선을 그리는 방식을 사용해서, 사물형상의 특징을 사람이 보면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나타내었지, 그림처럼 그렇게 복잡할 필요는 없었다. 예를 들어 '',''의 뿔 모양이 다른 것은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와 같은 자는 가로로 쓰면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커서 세로로 바꿔 쓴 것으로서, 이는 갑골문자가 이미 그림의 단계를 벗어나, 진정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변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언어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모두 그릴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 갑골문에서는 숫자와 같이 형상이 없는 문자는 선으로써 표시하였다.
 
상형자2
 
일부 따라서 그릴 실제적인 외형이 없는 추상적인 개념은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데, 갑골문에서는 여러 방식을 사용해 표시하였다.
 
지사자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일종의 표의문자로, 점과 그림을 가지고 가리키고자 하는 의미를 나타냈다. ‘위’와 ‘아래’라는 개념은 형체가 없다. 따라서 갑골문에서는 “-”과 “⌣”의 위아래를 가지고 사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彭(팽)자의 왼쪽은 鼓[북]이고, 오른쪽 몇 획이 나타내는 것은 북의 소리이다. 暈(훈)자는 해 주변을 그린 것에 몇 획을 그려 태양 주변에 펼쳐진 빛을 나타냈다. 皂(조)자를《說文解字(설문해자)》에서는 “穀之馨香也(곡지형향야)(곡식의 향기이다)”라고 뜻풀이를 하고 있는데, 갑골문 는 식기이고, 위에 있는 몇 개의 점은 음식물의 향기를 나타낸다. 이러한 표의문자는 지사자(指事字)라고 칭한다.
사물의 구체적인 모양을 도형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 행위나 동작에 속하는 단어는 갑골문에서는 또한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회의자
 
出, 발(止)이 입구(凵)에서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步, 두 발(止)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나타낸다
 
陟, 두 발(止)이 언덕(阜)을 오르는 것을 나타낸다
 
降, 두 발(止)이 언덕(阜)을 언덕을 내려오는 것을 나타낸다
 
墮, 한 사람(人)이 언덕(阜)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立, 한 사람(大)이 땅(一)에 서 있는 것을 나타낸다.
 
至, 화살(矢)이 땅(一)에 와 닿은 것을 나타낸다
 
折, 도끼(斤)로 나무를 쳐 나무(木)가 잘라진 것을 나타낸다
 
獲, 손(又)으로 새(隹) 잡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得, 손(又)으로 조개(貝:돈)를 얻었음을 나타낸다
 
爲, 손(又)으로 코끼리(象)를 끄는 것을 나타낸다
 
馭, 손(又)으로 말(馬)을 끄는 것을 나타낸다
 
牧,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攴)으로 소(牛)를 치는 것을 나타낸다
 
伐, 창(戈)으로 사람(人)을 사람을 베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회화의 형식으로 두 개의 형체를 하나로 조합하여 뜻을 나타낸 문자이며, 이를 회의자(會意字)라고 한다.
지금까지 예를 들어 살펴본 글자는 상형자, 지사자, 회의자인데 모두 도형으로 나타낸 것이다. 후에 자형이 전문(篆文), 예서(隸書)로 변하고, 또 다시 해서(楷書)로 변하였지만, 시종 원래의 도형적인 특징은 사라지지도 않았고, 표음문자로 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갑골문에는 위의 세 가지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가 전체 글자 수의 70-80%에 달한다. 그만큼 갑골문의 자형은 그림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모든 개념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여 이미 존재하는 글자의 독음을 빌려서 다른 의미의 글자로 쓰는 가차의 방법도 사용되었다.
 
  문자 의미 가차(假借)된 의미
키 其 其 그(삼인칭)
구름 云 云 구름 말하다
저녁 저녁 아니다,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글자를 두 가지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불편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기존의 글자를 변화시켜 본래의 의미와 가차(假借)된 의미를 구별하는 방법도 나타냈다. 즉 云에서 雲을, 其에서 箕를, 莫에서 暮를 새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분석해 보면 원래의 글자는 교묘하게도 새로 만들어진 글자의 음과 같다. 즉 원래의 云은 雲의 소리 부분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서 착안하여 사람들은 구조상 반은 의미를 나타내고, 반은 음을 나타내는 형성자(形聲字)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江 江, 水가 의미를 나타내고, 工이 소리를 나타낸다.
河 河, 水가 의미를 나타내고, 可가 소리를 나타낸다.
 
“江”, “河”와 같은 글자와 “雲”, “箕” 등과 같은 글자와 다른 점은 전자는 처음부터 의미 부분과 소리 부분이 결합하여 만들어졌지만, 후자는 소리 부분이 원래의 글자로서 이들이 다른 의미로 가차되어 사용되자 의미 부분이 첨가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의 갑골문 이후 대부분의 글자는 이러한 방법에 의해 만들어져, 진대(秦代)의 소전(小篆)에 이르면 이러한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가 전체 한자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집필자 이재돈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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