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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문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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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자체의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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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네모반듯한 한자 자체를 해서(楷書)라고
하거나 혹은 정해(正楷)라고도 한다. 해서는 3~4세기 위진(魏晋)시대에 처음
형성된 자체이다. 위진 이전 은(殷), 상(商)대로부터 진한(秦漢)대에 이르기까지에도
한자의 자체는 큰 변천과정을 겪었다. 한자 자체의 변천은 주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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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주(商周)의 고문자에서 진대의 소전
상대의 문자는 점을 친 글이나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필획이 간단해진 일종의 부호였다. 그러나 많은 문자들이
형체와 의미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아직 그림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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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추(隹), 치(齒) 두 글자는 모두 상형자이고, 흥(興)은 네
개의 손이 함께 들고 있는 형상이고, 성(聖)은 사람이 발돋움하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형상이다. 병(竝)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고, 축(逐)은
사람이 豕(돼지)를 쫒는 형상이며, 남(男)은 쟁기를 가지고 밭에서 경작하는
모습이다.
주(周)대에 이르러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는 갑골문과 매우 가깝지만, 단지 필획이
약간 변하였다. 그리고 칼로 새긴 갑골문과는 달리 주조한 것이기 때문에 필획이
갑골문에 비해 두텁다. 아래에서 왼쪽은 갑골문이고 오른쪽은 동기(銅器)에 새겨진
명문(銘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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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1:
西周시기 毛公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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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2:
毛公鼎에 새겨진 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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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책을 쓰는 도구로
죽간(竹簡)과
비단이 생겨 문자를 새기거나
주조하지 않고 붓으로 쓸 수 있게 되자 문자는 한층 편리하게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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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6-1:
옛 楚지방에서 발견된 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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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2: 옛 楚지방에서 발견된 帛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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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각 나라의 문자는 각기 지방마다 특색이 있어 일치하지 않았다. 전국시대
여러 나라 중 서쪽에 위치하였던 진(秦)나라의 문자는 서주(西周)의 문자를
계승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대전(大篆)이라
불리는 문자로 필획이 약간 복잡하였다. 진나라 때 통칭
석고(石鼓)라
하는 돌에 새긴 문자가 바로 대전(大篆)이었다.
그러나 진(秦)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는 동쪽에 위치하면서 문화도 비교적
발달하여 한자의 자형도 진보다는 훨씬 간단해졌으며, 이들 여섯 나라 사이에도
문자의 형체가 서로 많이 달랐다. 이들은 진대의 문자통일정책에 따라 쓰이지
않다가 한대에 와서 발견되어 이후 고문(古文)이라 불리어졌다.
진대의 문자통일정책이란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하고 통일 왕조를 세운 후 이사(李斯) 등에 의해
제기된 정책으로서 진나라의 문자와 합치되지 않는 것은 버리고 일치하는
것은 취하는 방법으로 문자를 통일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생겨난 자체가 소전(小篆)이다.
소전은 대전에 비하면 자체(字體)도 간단하고 구조는 금문에 비해서 훨씬 가지런하게
정리되었고, 쓰는 방법도 일정한 규범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편방을 동일하게
따르는 글자들은 편방(偏旁)의 쓰는 법과 위치 또한 일정하여, 이전에 비해 상당히
체계화된 문자였다. 예를 들면 ‘女’를 부수로 하는 글자는 금문에서는 부수인
‘女’를 대부분 오른쪽에 썼지만, 때로는 왼쪽에 쓰기도 했는데, 소전에서는
일률적으로 왼쪽에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言’ 부수도 금문에서는 오른쪽,
왼쪽 모두 썼는데, “許”, “諫”처럼 소전에서는 일률적으로 왼쪽에
썼다. 또한 금문에서는 彳과 止를 따르는 글자들은 彳은 왼쪽에 쓰고, 止는
오른쪽 밑에 썼는데, 소전에서는 일률적으로 왼쪽에 합쳐서 쓰게 되어 辵이 되었다.
진왕조가 문자를 통일한 결과 나타난 소전은 비록 상·주문자로부터 발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고 발전된 자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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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ㆍ한의 예서(隸書)
예서는 간략해진 전서가 점차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전국시대의 병기문자가
이미 간결해지고 있었고 이것이 전수되어 진나라 때 전서와 비슷한 예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으며,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는 관청에서도
소전을 대신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대에 이르러 예서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일상에서 응용하는 자체(字體)가 되었다. 예서가 전서와 다른 점은 주로 3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辵부수가 辶로, 阜부수가 阝부수로 변하는 등 필획이
간략해졌다. 둘째, 구조체제가 바뀌었다. 예를 들면, 부수로 쓰이는 王과 玉은
王으로, 肉과 月, 일부 舟를 모두 月로 쓰는 등 여러 개의 부수가 하나로
합쳐졌다. 셋째, 전서의 곡선이 직선이나 네모반듯한 형으로 변하는 등 소전에
비해 훨씬 쓰기 편리하게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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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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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의 출현은 한자가 복잡한 것에서 간단하게 변하게 된 일대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서를 완전히 해체시킨 예서가 등장함으로써
한자는 이제 완전히 그림의 성격을 벗어나 선과 선이 결합하여 어떠한
의미를 나타내는 부호가 되었다. 이와 함께 한자는 더욱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어 사회생활에서도 더욱 큰 역할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자는 갑골문에서 소전까지를 고문자(古文字), 예서 이후의
문자를 근대문자로 구분하며, 소전에서 예서로의 변화를 예변(隸變)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체(字體)가 지나치게 간단해지고 부호화되자 지식층에서는
예서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한무제(武帝) 이후
공식적인 자체(字體)로 인정을 받고, 또 동한(東漢)시기부터는 종이가
이미 대량 생산되어, 문자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지자 예서에 능한
서예가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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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대에 예서가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에는
초서(草書)도
생겼다. 초서는 거칠고
단정하지 못한 예서라 할 수 있다. 한(漢)·위(魏) 시기에 통용된 것은 장초(章草)라
한다. 한(漢)말에는 당시까지 유행하던
해례서(楷隸書)를
간략화한
행서(行書)가
생겼고, 동진(東晋) 시기에는
금초(今草)가 생겼다.
이는 실용적인 편리를
위해서 계속 새로운 서체가 출현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초서가
추구하는 전체적인 글자의 형체는 예서와 비슷하여,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행서
또한 거친 모양으로 치우쳤으므로 사람들은 해서(楷書)를 중시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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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진(魏晋)이후의 정해(正楷)
“楷(해)”는 규범적이라는 뜻이다. 한대에 해례서(楷隸書)가 생긴 이후, 위진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서(正書)가 생겼다. 정서는 진서(眞書)라고도 부르는데 해례서와
다른 점은 필체의 힘이 감소하였고, 필획도 평이하고 완만한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당대 이후부터 일상생활에서 상용되는 자체가 되었다.
한자 형체의 변천과정을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商·周 고문자부터 소전까지가 한
시기이고, 소전에서 예서로 발전한 것이 또 한 시기, 예서에서 해서로 발전한
것이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추세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서 간편하고
쉬운 것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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