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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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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계몽기(개화기)의 문자 생활사
1.1 운서와 문자 생활
1894년 갑오경장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은 이 시대를 그 이전 시대와 구별 짓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으로 바꾸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실로 450년 만에 언문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 문자 생활에서 많은 부분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조치였다.
그런데 이 칙령 제14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기적인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결정은 점차 앞뒤가 바뀌게 되었다. 본으로 삼는다던 국문보다 과도적인 국한문이 당시에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 이전 시대의 문자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현실적인 양상은 국한문이었다. 당시에 나오던 <한성주보>가 그러했고, 1895년 7월 소학교 국어 교과서인 「소학독본」 역시 국한문이었다. 이러한 실정은 칙령을 공포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부의 <관보>의 경우, 갑오경장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으나, 바로 다음 해 국한문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1908년 2월 6일 <관보> 관청사항에서 공문 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정에서 어긋난다고 경고하면서,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결론은 당초의 칙령 공문식이 폐기된 것이고, 당시 문자 생활의 혼란함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한문 중심의 양반층의 문자 생활을 극복하고 평민 중심의 국문으로 전환하려 했던 당시의 노력은 전래해 온 한문 중심의 문자 생활의 권위에 저항하다가 결국 일부 굴복하게 된 양상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상적인 요청은 언문일치였다. 그것은 일상언어로 표현코자 했던 국어의 근대적 지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 생활은 정부 및 언중들의 의식 속에 각인되지 못했고, 그방향은 국한문 혼용이라는 과도기적 문자 생활인 동시에 전통적 문자 생활이었던 것이다. 근대적 사회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대응이었고 그러한 양상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러한 문자 생활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1896년 4월에 순국문지로 창간된 <독닙신문>의 경우 당시의 현실적 문자 생활이었던 국한문혼용을 벗어나 최초의 띄어쓰기를 보여주면서 한자 폐지와 국문전용을 절실하게 주장하였다. 당시 창간호에서 서재필의 논설의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토로만 쓰 거슨 샹하귀쳔이 다 보게 홈이라 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여 쓴즉 아모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잇 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이라 각국에셔 사들이 남녀 무론고 본국 국문을 몬저 화 능통 후에야 외국 글을 오 법인 죠션셔 죠션 국문은 아니 오드도 한문만 공부 에 국문을 잘 아 사리 드물미라 죠션 국문고 한문고 비교여 보면 죠션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니 첫 호기가 쉬흔이 됴흔 글이요 둘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을 한문 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어 보기가 쉬흘 터이라 한문만 늘 써 버릇고 국문은 폐 에 국문만 쓴 글을 조선 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 못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리요.(서재필, “논셜” 「독닙신문」뎨일호, (1896)).
   
 
그는 국문이 한문보다 더 배우기 쉬운 글이며, 상하귀천이 모두 알아 볼 수 있는 글이 국문이며, 한문을 고집하고 국문을 포기한 까닭에 모든 국문을 모르는 조선 인민이 많음을 한탄하면서 국문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또한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자신이 쓴 ‘국문론’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품고 있던 국어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아래의 논설에서 언어와 문자의 개별성을 언급한 후 ‘말하는 음대로 일을 기록하여 표하는 글자’와 ‘무슨 말은 무슨 표라고 그려 놓는 글자’로 구분하며 전자를 ‘참글자’라고 후자는 ‘그림’이라고 이름해야 하며 글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곧 표음 문자로서의 국문과 표의 문자로서의 한문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데 전자는 주시경이 이후에 쓴 다른 문헌에서 ‘기음문자(記音文字)’로 ,후자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주시경의 국어관은 국문 중심의 문자관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리글자인 우리 국문가 뜻글자인 한문보다 ‘말과 일을 표는데’ 더 유용하다고 한 점에서 이전의 서재필이나, 지석영보다 우리 문자를 좀더 미시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주시경의 “국문론”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들 샤는 덩이 우희 다셧 큰 부쥬 안에 잇 나라들이 졔 각금 본토 말들이 잇고 졔 각금 본국 글들이 잇서셔 각기 말과 일을 긔록고 혹간 말과 글가 남의 나와 흔 나라도 잇 그즁에 말는 음로 일을 긔록야 표는 글도 잇고 무 말은 무 표라고 그려 놋 글도 잇지라 글라 거슨 단지 말과 일을 표  거시라 말을 말노 표 것은 다시 말 잘 거시 업거니와 일을 표면 그 일의 연을 자셰히 말노 이약이를 여야 될지라 그 이약이를 긔록 면 곳 말이나 이런 고로 말  거슬 표로 모하 긔록여 놋 거시나 표로 모하 긔록 여 노흔 것슬 입으로 닑 거시나 말에 마듸와 토가 분명고 서로 음이 야 이거시 참 글요 무 말은 무 표라고 그려 놋 거슨 그 표에 움작이 토나 형용  토나  다른 여러 가지 토들이 업고  음이 말 것과 지 못 니 이거슨  그림이라고 일홈 여야 올코 글라 거슨 아죠 아니 될 말이라(쥬샹호, “국문론” 「독닙신문」2-47, (1897)
   
 
그는 또한 9월에 두 번째 “국문론”을 발표하여 국문전용의 방안을 주장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문법을 만들어 교육할 것, 둘째, 국문옥편(사전)을 만들어 바른 고저음을 표시할 것, 셋째, 조선말이 아닌 한자어를 쓰지 말고 쉽게 번역할 것, 넷째, 말의 경계를 옳게 찾아서 표음주의가 아닌, 형태를 밝혀 쓸 것, 다섯째, 글씨를 쓸 때, 그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 것 등이었다. 이것은 대단히 개혁적이면서 구체적인 안이었으며 이미 시대를 앞서간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 문자 생활에서는 반영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주시경 자신도 1910년 일제 감정기 이전까지 이러한 문자 생활을 일관되게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지석영 역시 11월에 국문으로 “국문론”을 발표하여 국문의 통일을 주장한 바 있으며, 이봉운도 그의 저서 「국문정리」의 서문을 통해서 우리 국문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조선 사람들을 질타하고 국어 사전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 서문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위기 려항의 션 죠졍의 공경이 츙심은 가지기로 진졍을 말니 대뎌 각국 사은 본국 글을 슝샹야 학교를 셜립고 학습야 국졍과 민를 못 일이 업시야 국부 민강것 죠션 사은 의 나라 글 슝샹고 본국 글은 야죠 리치를 알지못니 졀통지라 … 문명의 뎨일 요긴거슨 국문이 반졀 리치를 알 사이 적기로 리치를 궁구야 언문옥편을 … (리봉운, 국문졍리(1987) 셔문).
   
 
위에서 언급한 순국문 중심의 문자관이 당시에 개혁적이고 근대 지향적 연구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강조되기 하였으나, 현실적인 문자 생활을 구시대의 그것을 바로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언문일치의 실현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이광수는 1910년 7월에 <황성신문>에서 발표한 “今日(금일) 我韓用文(아한용문)에 對야”라는 논설을 통해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으로는 순국문을 쓰고 싶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신지식 수입에 저해가 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문으로 된 말만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언문일치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이겠으나, 문자 생활의 측면에서 엄밀히 보면 순한문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것이었다. 그 원문의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余의 마로 진, 純國文으로만 쓰고 십흐며,  면 될쥴 알되, 다만 其甚히 困難쥴을 아름으로 主張키 불능며…이 에, 解키 어렵게 純國文으로만 쓰고 보면, 新知識의 輸入에 沮害가 되슴으로, … 只今 余가 主張바 文體 역시 國漢文倂用이라, … 固有名詞나 漢文에서 온 名詞, 形容詞, 動詞 등 國文으로 쓰지 못것만 아직 漢文으로 쓰고, 그 밧근 모다 國文으로 쟈 이라, … 事勢가 이러니, 맛은 업스나, 먹기 먹어야 살지 어나가”
   
 
이러한 난맥상이 벌어진 것은 당시의 근대적 개혁이 자주적이지 못한 측면에 기인한 바도 있을 뿐더러 그러한 문제를 다룰 어떤 기관이나 학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에서 국문론을 주장한 주시경이 그나마 독보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독립신문>의 개혁적 문자 생활과는 달리 정부에서는 정책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이 있을 리 만무했고, 문자 생활에서 표음주의와 형태주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ㆍ’ 문제를 처리하는 것조차도 대단한 고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문을 본으로 삼고자 했던 이상 실현을 위해 우리말 규범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절박한 일이었다.
 
1.2 국문연구소와 문자 생활
<독립신문>에 관여하고 있던 주시경은 신문사 내에 국문동식회를 조식하고 철자 통일에 대한 계획을 꾀하였다. 통일되지 않은 철자법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그는 받침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는 형태주의적 표기로의 개혁을 구상했다. 이것은 그 이전 시대의 음소주의 내지는 표음주의를 벗어나고 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이후 발간된 그의 저서 「대한국어문법」(1906)과 「國語文典音學」(1908) 등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철자법에 대한 고민 속에서 주시경은 아래아의 처리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그의 1997년 논설 “국문론”에서 아래아를 ‘저음 아’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뒤 그는 「대한국어문법」에서 아래아를 ‘ㅣㅡ’의 합음이라고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 주장을 이어받아 당시 지석영은 ‘ㅣㅡ’의 합음자로 ‘=’를 고안해 내었다.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그의 「신정국문」 실시건은 1905년 7월에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와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반대에 부딪쳐 당국은 그 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현실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학부에 설치된 것이 국문연구소였다. 1907년 7월 최초의 근대적 국어 연구 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2년 후인 1909년 12월까지 23회의 회의를 개최하여 당면한 10가지 문제에 대한 최종 방안을 어윤적, 주시경, 이능화 등이 주축이 된 10명의 의원을 중심이 <의정안>이란 이름으로 의결, 작성하고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一. 國文의 淵源과 字體及 發音의 沿革(可)
二. 初聲中 ㆁㆆ ㅿ ◇ ㅱㅸㆄㅹ 八字의 復用當否 (否)
三. 初聲의 ㄲ ㄸ ㅃ ㅆ ㅉ ㆅ 六字 並書의 書法一定(可, ㆅ은 폐기)
四. 中聲字 ‘ㆍ’자 폐지 및 =자창제의 당부(否)
五. 終聲의 ㄷㅅ 二字用法及 ㅈㅊㅋㅌㅍㅎ 六字도 終聲에 通用當否(可)
六. 字母의 七音과 淸濁의 區別如何(五音과 淸音, 激音, 濁音으로 구분)
七. 四聲票의 用否及 國語音의 高低法(四聲票는 不用, 長音 左肩一點)
八. 字母의 音讀一定(ᅌ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ㅊ 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이ㆍ)
九. 字順行順의 一定(初聲 牙舌脣齒喉와 淸激, 中聲 「訓蒙字會」순)
十. 綴字法(訓民正音例義대로 仍舊綴字-모아쓰기)

1. 국문의 연원과 국문 자체 및 발음의 연혁
2. 초성 가운데 ‘ㆁ, ㆆ, ㅿ, ㅱ, ㅸ, ㆄ, ㅹ’ 8자를 다시 사용할지 여부
3. 초성의 된소리 표기를 ‘ㄲ, ㄸ, ㅃ, ㅆ, ㅉ, ㆅ’ 6자로 정할지 여부
4. 중성 가운데 ‘ㆍ’자를 폐지할 것인지, 그리고 ‘ᆖ’자를 창제할 것인지 여부
5. 종성의 ‘ㄷ, ㅅ’ 2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할지 여부
6. 자모의 7음과 청탁의 구별 문제
7. 사성표를 사용할지 여부 및 국어음의 고저를 표기할지 여부
8. 한글 자모의 명칭을 정하는 문제
9. 자순(字順), 행순(行順)을 정하는 문제
10. 철자법
   
 
이상의 10개의 연구 과제에 대해 위원들이 한 과제씩 연구하고 의결한 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한 것이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인데, 이에 따르면, (1) 국문의 연원에 대해서는 고대 문자 기원설을 인정하지 않고, 향가 및 이두를 “國文(국문)을 造作(조작) 思想(사상)의 胚胎(배태)”로, 곧 “국문을 만들어 지어낼 사상의 싹을 돋아나게 한 것”으로 보았으며, 자체는 “字體(자체)는 象形(상형)이니 古篆(고전)을 倣造(방조)지라”라고 하여, “자체는 상형, 곧 형상을 본뜬 것이니 옛날의 전자체(篆字體)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보았으며, (2) 초성자 가운데 중 “ㆁ ㆆ ㅿ ◇ ㅱㅸㆄㅹ” 8자는 더 사용하지 않기로 의결하였으며, (3) 각자병서 “ㄲ, ㄸ, ㅃ, ㅆ, ㅉ”을 된소리 표기로 통일하여 사용하되, ㆅ는 폐지하기로 의결하였다. 또한 (4) ‘ㆍ’를 폐지하자는 안과 ‘ᆖ’ 자를 창제하자는 두 안을 모두 부결하기로 하였으며, (5) “ㄷ, ㅈ, ㅊ, ㅋ, ㅌ, ㅍ, ㅎ” 일곱 초성자를 모두 종성에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당시의 어문 관습으로 볼 때는 획기적인 의결을 이끌어냈으며, (6) 자모는 5음과 청음, 격음, 탁음으로 구분하였고, (7) 성조 구분은 하지 않되, 장음에 한해서 글자의 왼쪽 어깨에 점을 하나 찍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며, (8) 모든 자음의 자모의 이름을 “ㆁ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ㅍ 피읖 ㅊ 치읓”과 같이 2음절로 정하였으며, (9) 자모의 순서에 있어서 초성은 “ㆁ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ㅈ ㅎ ㅋ ㅌ ㅍ ㅊ”의 순서로,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ㆍ”의 순서로 정하였으며, (10) 철자법은 <훈민정음> 예의대로 모아쓰기로 결정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문연구의정안≫의 의결된 내용들은 국어정서법을 마련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의 결실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비록 1910년 국권 상실로 인해 그 공포·시행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국문연구소의 위원 가운데 일부가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1912)을 제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등, 국문연구소의 연구 결과가 현행 한글맞춤법에 직간접적으로 접맥된다는 큰 의의를 갖는다. 특히 현행 한글맞춤법이 형태음소론적 표기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초성을 종성에 다 사용하는 받침 규정에 있다고 할 것인데, 이 규정은 ≪국문연구의정안≫의 제5제에서 결정된, 모든 초성을 종성에 사용하게 한 받침 표기 규정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국문연구의정안≫이 현행 한글맞춤법의 형태음소론적 성격을 결정짓는 단초가 된 점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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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상혁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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