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1.3 외래어의 표기 문제와 문자 생활 |
|
 |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일본 및 서양 문물이 밀어닥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문자 생활은 외래어 표기를 중심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중국 문명의 물결이 주춤하고 또 다른 외래 문명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는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면서 그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다. 문자 생활사에서
외래어에 대한 표기 문제 역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외래어는 한자 표기 혹은 국문 표기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서양 외국의
문자로 된 외국의 고유 명사 명칭은 국문으로 바꿔 적을 것을 이미 1894년에
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한 표기의 예는 <관보>의 외보에 드러나기도
하고,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에서도 그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大韓帝國學部編輯局 譯,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대한제국학부편집국 역)
권두 “인지제명표(人地諸名表)”에서는 서양음을 표기하면서
원음주의를 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b,d,g,j,s’ 등을 된소리 표기로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1987년 이봉운은 그의 「국문정리」에서 탁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일어 표기에
부호를 써서 적을 것을 주장했고, 1908년에는 정약용 저 지석영 주석의 「아학편(兒學編)」에서는
중국어, 일어, 영어를 특이한 표기로 적기도 하였다. 이 책은 실상 2000자의
한자 교본이지만, ‘아해(한국어), 얼(중국어), 고지(일본어), 촤일드(영어)’를
한자 ‘兒(아)’의 칸에 좌우 아래에 배치하여 표기하고 있다. 「국문정리」와 「아학편」의
의도는 외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칠 목적이기 때문에 단순한 외래어 표기와는
달랐고, 외래어를 외국어로 인식하는 혼동 내지는 착각에서 기인한 원음주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국문연구소에서도 이 외래어 표기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능화의 의견이 일부 남아 있다. 그는 철자법에 관한 의견에서 서구어 발음의
음역을 주장하면서 중국 한음으로 중역하지 말고 본국어로써 음역법을 사용할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 예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
| |
 |
 |
 |
 |
| |
|
| |
歐羅巴 - 유러ㅍ(英語音), 으ㅜ러빠(漢語音), 구라파(韓語音)
埃及 - 이지ㅍㅌ(英語音), 애지(漢語音), 애급(韓語音) |
| |
|
|
 |
 |
 |
 |
|
| |
이러한 표기는 국문 자모의 초중종성 혼합 합성법을 활용하게 함이 필요하다고
보고 서구어와 같은 초종성의 중자음 및 복모음을 표기하기 위한 합자법과 같은
복잡한 철자법을 제의한 것이였다. 이 역시도 위에서 언급한 <태서신사람표>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역시 원음주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당시 대부분의 외래어 표기는 외국어의 발음 표기의 양상으로 전개된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일본식 외국어 표기의 답습, 중국 한음의
발음을 반영한 표기, 중국 한음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어 표기한 표기, 서구어
발음의 원음주의적 표기 등이었다. 초창기 일본, 서구의 어휘들이 유입되면서
전개된 다양한 표기의 양상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표기와 더불어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신어와 서구어의 한역을 통해서 들어온 신어들이 풍부해지면서 이 시대의
어휘을 통해서 본 문자 생활의 또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 |
 |
1.4 국어 연구 단체의 국문 보급과 문자 생활 |
|
 |
우리말과 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및 보급은 근대계몽기 후기로 가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의 일부를 상실한 당시, 국어학의
선각자 주시경은 한민족의 미래를 예감하면서 국어 연구와 국문 보급을 위하여
여러 단체를 결성하고 조직하였다. 그러한 여러 연구 및 강습 단체에 대한 실상을
정리하여 나중에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1917)는 이러한 근대계몽기
후기의 국어 연구 및 국문 보급이라는 문자 생활의 면모를 짐작케 하는 소중한
자료다. 주시경의 제자인 이규영이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기록은 하기국어강습소,
국어연구학회, 조선언문회, 조선어강습원과 관계된 내용을 하나의 묶음으로 구성한
책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1907년 주시경이 처음으로 하기국어강습소를 개설하여
국문 보급에 앞장 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국어 연구 및 국문 보급의
모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기 강습소의 개칙, 조직, 일정,
졸업 상황, 그리고 졸업 증서까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6회까지 하기 강습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6회가 이루어진 시기는 1914년으로 이 때는
이미 하기국어강습소가 ‘하기조선어강습소’로 바뀌었다. 1910년 경국국치이후
이미 국어의 위상이 조선어로 격하된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하기국어강습소를 시작으로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었다. 이 기관
역시 연구 기관이었으나, 국어 및 국문 보급을 위하여 산하 강습소를 두었다.
이 강습소는 후일 국어 연구와 국문 보급을 위한 국어 연구자 및 새로운 강사진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중 2회 졸업생으로는 김두봉과 최현배가
있다. 이들은 주시경의 사전 편찬과 국문 보급을 계승한 제자들로서 한 명은
북쪽으로, 다른 한 명은 남쪽에 남아서 국어 연구에 기여를 하게 된 점이 아이러니하다.
또한 <한글모 죽보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국어연구학회가
1911년 배달말글몯음(朝鮮言文會)로, 그리고 1913년 한글모로 바뀌면서
그 체계를 정비해 나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산하 강습소로 조선어강습원이
1911년 설립되었고, 이 강습원은 1914년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7년까지 계속된다. 그러한 단체의 변모 과정을 겪으면서 국어 연구와 국문
보급에 매진한 것을 알 수 있다. 1921년에 창립되어 <한글학회>의
모태로 알려진 조선어연구회는 1913년 한글모로, 1911년 배달말글몯음로,
1908년 국어연구학회로 소급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글학회>의
선사(先史)와 그 연원을 따질 때, 그 시작은 이미 근대계몽기에 이루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학회의 활동은 곧 당시 우리의 문자 생활을 영위케
한 바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 |
 |
2. 일제강점기의
문자 생활사 |
|
 |
| 위와 같은 학회 및 강습소 중심의 국문 보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국권침탈이라는 수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 시대의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고, 우리의 국어는 조선어로
격하되는 아픔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어문 정책 및 표기법, 그리고
일부 사전편찬은 그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근대계몽기 이래로 국어연구와 국문 보급에 남다른 노력을 한 국어학자들에 의해
한편으로 우리의 문자 생활을 위한 표기법과 표준어가 정해지고 사전 편찬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우리의 말글살이는 그 명맥을 유지해 갔다. |
| |
 |
2.1 일제강점기의 표기법과 문자 생활 |
|
 |
식민지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세력은 피지배 민족의 글과 말을 말살하거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책이다. 그러나 일본의 초기적 태도는
달랐다. 의도를 정확히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으나, 일제 초기의 어문 정책의
일환이었던 표기법 문제는 그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짐작만을 해 본다면
그것은 고도의 식민 통치 술수였는지 모른다.
일제 강점기의 철자법은 1912년 4월에 확정된 <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이
그 처음이었다. 이것은 대한제국 시대 보통학교 교과서 철자법이 복잡하고 학습에
불편을 준다는 점을 인정하고 마련한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재의 철자법이다. 그들이
주관을 하였으나, 당시 조선의 학자로는 유길준, 어윤적, 강화석 등이 다섯
차례 회의에 참여하여 확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학자 주시경의 이름은
볼 수가 없다.
이 철자법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한자음은 역사적 표기법으로 하고,
당시 ‘현대 경성어’를 표준으로 삼아 크게
1) 아래아의 폐기, 2) 된ㅅ의 사용, 3) 받침 10개(ㄱㄴㄷㄹㅁㅂㅅㅇㄺㄻㄼ),
4) 왼쪽 어깨에 1점으로 장음 표시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어에 대한 표음주의적 표기법으로 평가할 만한 것으로 완전한 표음주의는
아니었다. 그 이전 시대의 철자법을 가다듬었다는 점에서 그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기는 하나, 체계화된 최초의 통일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자음의
경우 그 운이 혼란스러워질 염려를 하여 종전의 것을 고수했다는 점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규정은 당시 보통학교용 「조선어급한문독본」에 채용되었고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조선어사전」(1920)의 표기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서
당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초기의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1912)은 교육과 사전 편찬
등에 실제로 적용되면서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나타나 수정과 보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학무국은 1921년 2월 철자법조사회를 설치하고 학무국안을
바탕으로 심의하여 1912년 철자법의 개정안으로 <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大要>를
마련하였다. 크게 1) 왼쪽 어깨 1점인 장음 표시의 폐지, 사이시옷의 표기
위치에 대한 규정(예: 동짓달, 외양), 3) 새 받침에 대한 논의(ㄷㅌㅈㅊㅍㄲㄳㄵㄾㄿㅄ),
4) 두음법칙의 무시와 원음 표기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철자법에 대한 개정안 중 특이한 사항은 당시 쓰지 않기로
했던 11개의 새 받침 사용을 논의했다는 점이다. 새 받침을 허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해서 결국 이 받침의 발음이나 교육 상의 어려움
등의 이유를 들어 나중에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1912년 철자법이
음소주의적 표기법이었다면 그 틀 안에서 형태주의적 표기법을 논의했다는 점에
이후 철자법 개정의 불씨였다.
이후 1920년대 후반기가 되자, 당시 신문에도 보도된 소위 ‘철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구파로 지칭되는 표음주의 지지자와 신파로 지칭되는
형태주의 지지자의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1928년부터 심의된 내용은 1930년
중추원에 넘겨졌으나, 격렬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중추원 회의에서
철자법은 전문가의 연구에 맡기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통화되었다. 이것이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1930)이다.
이 규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
 |
 |
 |
 |
| |
|
| |
1) 분명한 원사의 표시 (예 : 웃음, 깊이……)
2) 사이ㅅ의 채용과 표기 위치 개정 (예 : 동짓달,
일ㅅ군, 문ㅅ자……)
3) 10개 받침 이외의 새 받침 사용(ㄱㄴㄹㅁㅂㅅㅇㄺ
ㄻ ㄼㄷㅌㅈㅊㅍㄲㄳㄵㄾㄿㅄ의 21개 사용)
4) 구개음화의 부인 (예 : 같이-같치, 밭이-밭치)
5) 한자음의 표음화 (예 : 뎍당(適當)>적당,
회녕(會寧)>회령)
6) 된소리의 쌍글자 채택 (된ㅅ표기를 각자병서 ‘ㄲㄸㅃㅉ’으로
개정함. 예 : 지>까지) |
| |
|
|
 |
 |
 |
 |
|
| |
위의 철자법은 이전의 규범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그것은 1)과 3)항목과
같이 형태소의 기본형을 표기하는 형태주의적 표기법이 상당히 반영된 사실에서
이전의 음소주의적 표기법이 부인된 셈이다. 당시 심의 의원의 반수에 가까웠던
주시경파인 형태주의 지지자의 힘에 좌우된 것으로 짐작한다. 그리고 된소리의
표기도 종전의 ㅅ계 합용병서에서 각자병서로 바뀐 정도 특이한 것이었다. 이
철자법은 총독부에 의해 강행되고 심의위원 장지영의 <朝鮮語綴字法講座>(1930)를
비롯한 해설서가 보급되었으며, 교과서에는 1939년에 가서야 완전히 적용되었다.
이 철자법은 실제로 이후에 조선어학회 주도로 마련된 「한글마춤법 통일안」(1933)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일제 총독부 학무국 주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철자법 내용
자체에 정치적 의도가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없다 할지라도 완전히 자주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약 25년 이상 ‘언문철자법’의 시대였던 것이다.
문자 생활의 규범에 대한 주도권이 총독부에 있었던 셈이다.
일제 주도로 이루어진 철자법 제정과 관련된 문자 생활사와는 달리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로 발족되어 1931년 1월에 그 이름이 개칭되어 조선어학회가
탄생하였다. 이 학회의 중심 사업은 당시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 그리고 강습회와
조선어 정리 등이었고 궁극적으로 당시에 숙원이었던 조선어사전의 편찬에 있었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조선어학회에서는 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이를 위해
먼저 착수한 것이 철자법, 표준어,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전제 사업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930년 10월에 착수하여
1933년 10월에 완성된 것이 <한글마춤법통일안>이다. 우리 조선인
학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이루어낸 기념비적인 표기법이다. 이극로,
김윤경, 이희승, 최현배 등 18인의 위원이 참여하여 위원회, 수정위원회,
소위원회, 정리위원회 임시총회를 거쳐 총론 3항과 각론 7장 65항, 부록으로
이루어진 통일안이다. 먼저 총론의 규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
 |
 |
 |
 |
| |
|
| |
一. 한글 마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
二.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三.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웃 말에
붙여 쓴다. |
| |
|
|
 |
 |
 |
 |
|
| |
위의 一항은 이 규정의 전체적인 원리를 명시한 것으로 ‘소리대로’의 음소주의적
표기법과 ‘어법에 맞도록’의 형태주의적 표기법이 모두 수용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의 대원리는 현실음을 소리대로 적되, 이 때에는 ‘어법에 맞도록’
적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어법에 맞도록’은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어미, 때로는 어근과 접미사를 적을 때에 각각의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혀 표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구체적 표기에 있어서는 ‘소리대로’의 원리보다는 ‘어법에
맞도록’의 원리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총독부 철자법조사위 위원이었던 6인의 위원이 포함된 조선어학회 위원들이 이전의
<언문철자법>(1930)의 불철저함을 비판하고 제정했기 때문에 형태주의적
표기가 더 철저한 것이었다.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 |
 |
 |
 |
 |
| |
|
| |
1) 새 받침의 추가(ㅋㅎㅆㄶㄽㅀ)
2) 구개음화의 인정(밭, 밭이, 굳히다 등)
3) 준ㅎ의 설정(그러ㅎ다, 적당ㅎ지 등)
4) 사이ㅅ의 수정(동짓달, 장ㅅ군 -> 동짓달,
장군) |
| |
|
|
 |
 |
 |
 |
|
| |
이 <한글마춤법 통일안>(1933)은 그 후 국어 표기법의 중심이
되면서 몇 차례의 수정이 있었다. 1937년 1차 수정안은 1936년 10월
한글날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발표되자 그에 따라 각 조항에 사용한
말도 모두 사정한 표준말로 고친 수정판이다. 1940년 2차 수정안은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고치고 19항의 ‘갖후, 낮후, 늦후, 맞후’의 ‘후’를 ‘추’로
고쳤고, 30항의 사이시옷을 중간에 쓰고(코ㅅ날), 자음 밑에서도(손ㅅ등)
쓰도록 했다. 7장 띄어쓰기도 일부 용례를 고쳤고 부록 2의 문장부호는 대폭
추가했다. 해방이 된 후에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맞춤법>(1988)의 모태가 된 표기법으로 어문규범의 역사이자
문자 생활사의 중요한 규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남북한의 통일 규범을 논할
때, 그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는 규범이기도 하다. 서로의 규범 차이의 합의는
통일안 시대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것이 남북한 통일 문자 생활의 지름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일안의 제정과 아울러 1935년 1월에 사정하기 시작하여 1936년
10월에 완성하여 공표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채택되기에
이르렀고, 1931년 1월에 시작하여 1938년 원안이 작성되고, 1940년
6월에 결정이 이루어진 후, 1941년 1월에 간행하여 공표된 <外來語表記法統一案>이
만들어짐으로써 어문규정의 작업은 종료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봄에는 「조선어대사전」을
위한 원고가 탈고되었으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방 이전에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대사전을 끝내 보지 못했다.
이 조선어학회 사건은 당시 어문규범 제정 및 사전 편찬을 중심으로 우리 문자
생활을 주도했던 많은 국어학자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된 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고초를 겪었다. 1942년 8월 함흥 영생 고등학교 학생의 은사였던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이 잡히면서 불거진 이 사건은 10월에는 조선어학회를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라는 죄명으로 학자들을 관련시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함흥경찰서는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한징, 이중화, 정인승, 이병기, 정열모, 김선기 등이, 23일에는 김양수,
이은상, 안재홍 등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홍원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1년 동안
갖은 야만적인 고문의 시달림을 받은 끝에 기소되었다. 이극로, 한징, 이희승,
이윤재, 최현배, 정태진, 이극로, 이중화, 김양수, 김도연, 김법린, 이인,
장현식 등 13명만 공판에 회부하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는데, 판결 전에 이윤재와
한징은 심한 고문, 굶주림, 그리고 추위로 옥사하였으며, 나머지 11명은 각각
6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판결을 받았다.
이 시대 국어학자들은 국어학자이기 전에 어문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 것이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운동하는 것이라 믿었다.
근대적 학문과 전통적 학문의 갈림길에서 근대적 학문의 소양을 쌓은 그들은 한국어문
운동사 및 문자 생활사에서 귀감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선각자들이었다.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