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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문자 생활사
 
훈민정음은 우여곡절 끝에 창제되었다. 그 창제의 뒷이야기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지만, 신문자는 세종이 친히 만든 것이며, 그것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많다. 여기서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그들의 문자 생활을 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자 생활사는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언어 문화사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제 나라의 문자를 비로소 갖게 된 15세기 이후의 문자 생활사는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올곧이 드러내는 언중들의 살아있는 문화사이자 문명사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조선 전기의 문자 생활은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한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에서 여전히 한자의 권위에 의존해서 한문으로 글쓰기를 했던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자 생활의 경향은 한문이 토착화된 상황에서 한문에 토를 다는 방식의 구결로 글쓰기를 하거나 이두로 글쓰기를 했던 경향이 있었다. 이 방식은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해 왔던 전래의 방법과 아울러 15세기까지 전통적인 문자 생활의 양상이었다. 여기에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신문자를 바탕으로 한 문자 생활의 경향이 추가된 것이다.
신문자 창제 당시 최만리와 같은 반대론자들은 신문자가 오히려 문자 생활의 번거로움만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인한 조선 초기의 문자 생활은 한문, 차자표기, 한글이라는 다중 문자 생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문과 그 차자 표기 방법만으로는 당시의 욕구를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다중 문자 생활의 방식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지속되었고 조선 후기와 근대계몽기(개화기)로 가면서 각각의 문자가 지니는 위상이 뒤바꾸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1. 15세기의 문자 생활
1.1 운서와 문자 생활
훈민정음 창제 이후 15세기의 문자 생활은 신문자와 관련하여 몇 가지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다. 그 첫째는 운서가 새로운 방식으로 편찬되면서 펼쳐진 식자층을 위한 한글 문자 생활이다. 이 문자 생활은 당시 언중 중에서 민중들의 문자 생활과 유리된 측면이 있는 것이었으나, 식자층도 신문자의 혜택을 입고 있었다는 면에서 신문자 창제 초기의 중요한 문자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운서라는 것은 초창기에 대체로 직수입된 중국의 운서들이었다. 당시 고려의 식자층이 과거 시험을 보고, 한시를 짓는 문화적 행위를 할 때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운서였다. 그러나 수요가 늘면서 중국의 운서를 고려에서 직접 복간(覆刊)을 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양 원서에 대한 해적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프린트(Reprint)의 양상이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로 오면서 이러한 양상은 지속되었으나, 신문자의 창제는 새로운 운서의 편찬을 가능케 했다. 한자음의 주음 방식이 한자 두 자의 양자 표음법식 반절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 기능을 신문자인 훈민정음이 담당하고 훈민정음은 운서의 한자음을 다는 발음 기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국정운(東國正韻)」과 같은 조선 한자음 자전인 조선식 운서와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한어 발음 자전인 중국식 운서의 한자음의 발음 표시는 훈민정음의 몫이었다. 한자와 비교해 볼 때 표음문자로서의 훈민정음이 그 역할을 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식자층의 문자 생활에서도 훈민정음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자 생활에서 훈민정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조선 후기의 운서 편찬에서도 일관되게 유지가 된 것이다. 이 문자 생활은 민중들의 문자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으나, 훈민정음이 ‘반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고, 식자층에게도 훈민정음이라는 신문자는 중요한 문화 전달 수단이 된 것이다. 한문의 보조적 역할을 훈민정음이 한 결과이겠으나, 당시 식자층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문자 생활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1.2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과 문자 생활

훈민정음이라는 신문자는 한자음에 대한 발음 기호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말을 서사적으로 적을 수 있는 표기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 초기에 훈민정음은 한문으로 된 문헌을 번역하는 번역어, 일종의 메타언어로 그 기능을 수행한 측면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전개된 신문자와 관련된 문자 생활이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조선 왕조의 정당성 및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이데올로기)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유교 가치관에 대한 전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따라서 국가에서는 악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게 되었고, 그 첫 작업은 「용비어천가」로 귀결된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 건국과 관련하여 태조의 고조인 목조부터 태종에 이르는 여섯 대에서 이룬 업적에 대한 내용을 노래한 악장이다. 이 문헌은 125장에 이르는 것으로 한글 가시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 및 한문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건국 및 왕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초기의 문자 생활의 또 다른 측면이 국가 홍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백성들을 위해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를 바탕으로 한 국가의 정체성을 알리려고 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정책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에게 주어진 문자를 통해서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익히고 확인하여 백성 스스로가 공민의 지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문자 생활은 조선 왕조의 정당성 홍보에만 머물지 않는다. 조선 왕조의 국시라고도 할 수 있는 유교 이념의 전파도 신문자를 통해서 가능케 하고자 했던 정책적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삼강행실도」, 「내훈」, 등의 언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원래 세종의 명에 의해 설순 등이 1434(세종 16년)에 간행한 한문본이다. 이 문헌은 유교적 이념을 예컨대 효자, 충신, 열녀들의 뛰어난 행동의 예를 바탕으로 전하고자 엮은 책이다. 그러나 한문으로 된 이 문헌을 일반 백성이 읽고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그리하여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이 세종 및 세조 연간에 진행되고, 1481년(성종 12년)에 한문본을 언해한 언해본 「삼강행실도」가 출간되었다. 한문으로 된 문헌을 신문자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쉽게 익히도록 한 것은 교화적, 계몽적 의도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맥락은 한편으로 부녀자들의 교육에 필요한 「내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조선 왕조가 중심이 되어 간행된 문헌을 중심으로 그 문자 생활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용비어천가」와 같이 아예 한글 가사를 전면에 내세워 표기했던 유형이다.
둘째로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같이 한문 원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 표기 유형이다.
셋째로 「내훈」과 같이 한문 원문에 한글 토를 달고, 이어서 우리말로 번역한 표기 유형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도할 목적으로 간행된 문헌들로서, 그 문헌들에서 드러난 표기는 위와 같은 차이점이 존재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한글 가사이든 우리말 번역이든 국한문 혼용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당시 문자 생활의 중요한 측면이라 할 만하다.
종종 우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이 한글 전용 정신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신문자 창제 초기에는 어떤 방식이든지 한자와 신문자의 조화로운 병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신문자가 우리 문자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라는 것이 절대로 한자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차자표기로서의 이두나 구결 따위를 대체하는 역할을 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문자 생활에서 한문을 버리고 신문자만을 고집하려 했던 경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문자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한문의 상대적 위축은 가져왔겠으나, 그렇다고 혁명적으로 한문이 폐기되고 신문자로 대체되는 방식과 같은 문화사적 패러다임의 교체는 없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1.3 불경류의 언해와 문자 생활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왕조이었으나, 전래하던 불교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 초기는 많은 불경 등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당시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불교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았을 터이고, 심지어 왕실에서조차 불교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경에 대한 번역은 필연적이었으며, 이것은 조선 초기 사회의 시대상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경을 언해하는 작업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문자 생활의 면모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당시 불경 언해와 관련해서 우선 「석보상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세종이 소현왕후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명복을 빌고자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엮은 석가의 일대기로서 1447년(세종 29년)에 완성된 것이다. 중국의 한문으로 된 것을 뽑아 엮은 것이지만, 한문을 그대로 번역한 직역의 아니라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시 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최초의 불경 번역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왕실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유교를 국시로 했던 조선 왕조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것이지만 불교가 민중들의 삶뿐만이 아니라 왕실에서도 만연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장르의 성격 상 악장이긴 하지만, 내용상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월인천강지곡」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세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헌은 「석보상절」을 본 세종이 1447년(세종 29년)에서 1448년 사이에 간행한 것인데, 이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당대 문자 생활의 또 다른 측면을 우리는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다른 문헌과 비교해 볼 때 문자 표기 면에서 특이한 면모를 보인다. 이 당시 모든 한글 문헌은 먼저 한자를 큰 글자로 앞세우고 그 다음에 그 한자의 한자음에 해당하는 것을 정음으로 작게 표기했는데, 「월인천강지곡」은 그 반대의 배치를 보여준다. 정음으로 된 한자음을 큰 글자로 표기하고 그 다음에 작은 글자로 한자를 표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현실적인 받침 규정이라고 이해되는 8종성법을 따르지 않고, 명사나 용언의 기본형을 밝혀 표기한 것이나, 분철의 표기를 보여줌으로써 형태주의 표기법의 특징을 문헌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문헌이 세종이 지은 것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점으로 「훈민정음」 예의의 <종성부용초성>의 원칙과 부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두 책을 합쳐 간행된 「월인석보」도 당시 문자 생활과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문헌이다. 1459년(세조 5년)에 세조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석보상절」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간행한 책인데, 편찬 동기는 그 서에서 죽은 부모와 아들을 위하여 짓게 되었다고 밝힌 데서 찾을 수 있다. 한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 등을 죽인 후 겪은 정신적 고통과 회한에서 벗어나고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 책은 표기법에 있어 「월인천강지곡」과 다르고 「석보상절」과도 다르다. 우선 한자와 정음으로 표기된 한자음의 위치가 「월인천강지곡」과 뒤바뀌어 있다. 그리고 석보상절에서는 고유어로 표기된 것이 이 문헌에서는 한자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 그 특징으로 「석보상절」이 더 우리말다운 의역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면 「월인석보」는 상대적으로 직역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특히 이 문헌 권1의 앞부분에 「훈민정음」 예의의 국역본이 실려 있어서 이 문헌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더 크다. 앞부분에 <훈민정음언해본>이 있다는 것은 이 문헌을 읽기 전에 세종이 친히 만든 문자에 대한 대강의 예를 보인 내용을 익히라는 것일 터이고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밖에도 1461년(세조 7년)에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능엄경언해」」를 비롯한 많은 불경이 우리말로 번역되기 이른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성종대까지 약 50년간 40여종 200여 권의 번역서가 출간되었는데, 거의 한문의 번역이었고 15세기 문자 생활의 중요한 측면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번역 기관을 두면서까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위정자들 역시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내면적 속성은 고려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불경의 우리말 번역이었고, 이러한 번역은 신문자가 기능한 또 다른 메타언어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과연 당시의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문헌들을 얼마나 접하고 이해했는지 소상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미 15세기의 문자 생활은 신문자의 창제와 더불어 식자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자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백성들은 각종 문헌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전면적 이해를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한 문자 생활에 부분적으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자를 중심으로 한 15세기의 문자 생활이라는 것이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전개된 문자 생활은 아니었다. 신문자가 만들어진 후, 그 사용의 주체는 주로 왕실 및 귀족이었고 백성들은 그러한 문자 생활의 부분적 수혜자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차피 이 당시의 책이라는 것은 식자층의 전유물이 아니었겠는가? 따라서 15세기의 문자 생활은 위로부터의 신문자 보급 운동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로 가면서 문자 생활의 면모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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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상혁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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