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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6세기의 문자 생활
 
16세기의 문자 생활사는 연산군의 재위 기간과 맞물린다. 그러나 훈민정음 중심의 문자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504년(연산군 10년)에 언문 투서 사건이 벌어졌다. 언문, 즉 훈민정음으로 쓰인 투서 내용은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 사실을 연산군이 알게 되면서 언문은 ‘언문금압’이라는 이름으로 심각하게 탄압받게 된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가혹한 조치를 하게 되는데, “언문을 가르치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사람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언문을 아는 사람을 고발케 하라. 사대부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언문과 구결로 된 책은 모두 불태우라”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분서갱유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언문을 통한 문자 생활은 적잖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사건은 일시적이었을까? 시간이 흘러가면서 역서와 제문 등을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고, 어전에서 써야 하는 말을 언문으로 번역케 하는 등 여전히 궁중에서 훈민정음이 사용되었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백성들의 문자 생활은 위축되었으면서도, 궁중에서는 언문으로 문자 생활을 일부 영위한 것을 보면, 위정자의 입장에서 백성들이 글을 알고 쓰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지니는 효용성을 거스르지 못했고, 그러한 효용성의 방향은 16세기 문자 생활사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2.1 한자 교육, 외국어 교육과 문자 생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시대라고 한자의 권위가 급속히 추락한 건 아니었다. 백성들의 문자 생활에서 한자를 배우고 한문을 익힌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자를 배우고 한자음을 아는 과정은 이제 훈민정음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은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훈몽자회」의 간행은 한자 교육과 당시 한자음과 관련해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었다. 이 책은 「천자문」이나 「유합」과 함께 당시 아동들에게 한자의 뜻과 음을 가르치는 교재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목적이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으나, 방법은 언문을 익혀야 가능했다. 그리하여 「훈몽자회」 권두에 실린 <범례>와 ‘언문자모’는 이 책의 부수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최세진이 <범례>에서 언급한 내용을 통해 한자 교육의 방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변방이나 시골 사람들이 언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언문자모를 함께 싣는다. 먼저 언문을 배우게 하고 그 다음에 한자를 배우면 깨우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문자 생활에서 소위 언문이 가지는 중요한 기능을 말해준다. 한자를 익히기 위한 수단으로서 언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자와 대립하는 언문의 ‘俗所謂 反切二十七字(속소위 반절이십칠자)’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훈민정음의 이칭(異稱)으로서의 ‘반절’은 한자음을 한자 두자로 익혔던 과거의 습속(양자 표음법식)에서 벗어나 그 기능을 훈민정음이 대신한다는 의미의 ‘반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미 15세기부터 그러한 방법이 있었으나, 현실 한자음 교육을 위한 것은 16세기의 「훈몽자회」가 처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언문자모’를 통해서 현대 문자 생활 및 교육에서 한글자모 명칭으로 쓰이고 있는 ‘其役(기역), 尼隱(니은), 池末[디귿], 利乙(리을), 眉音(미음), 非邑(비읍, 時衣[시옷], 伊凝(이응) …’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들은 당시 한글자모 명칭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훈민정음의 보급 차원에서 실제 문자 생활을 영위하는 중인들의 이두로 표기함으로써 문자 습득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것은 곧 당시 식자층이든, 일반 백성이든 누구라도 한자를 배우고자 했다면, 이두로 된 언문자모를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문자 생활사에서 현대까지 그것이 명칭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자 생활사의 입장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외국어 학습과 관련된 문제이다. 중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역관들의 문자 생활이겠는데, 이들은 역관을 양성하고 외국어 교재를 간행하는 사역원에서 주로 중국어와 당시 조선어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한자음의 차이를 대조하여 「노걸대」, 「박통사」와 같은 한어의 회화용 교재를 언해하고 번역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지금으로 말하면 통역사, 혹은 외국어 교육자의 임무였겠으나,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전개한 문자 생활은 현실적이었다. 중국의 현실음과 그 구어를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운서에 기반한 한자음뿐만이 아니라 외국어, 특히 중국어 교육을 위한 문자 생활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한 것이었고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1517년)는 운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으나, ‘금속음(今俗音)’이라 하여 북경 관화음(官話音)의 변천에서 당시 통용되는 발음을 추가하여 올바른 발음 사전을 지향한 것이었다. 이것은 운서라는 점에서 위에서 구어 중심의 언급한 중국어 회화 교재의 한어 발음과는 차이가 있었겠으나, 역관의 신분으로 운서음에 대한 조예가 깊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국어학사의 측면에서는 대조언어학자이자 역관인 최세진이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한자 주음법(注音法)을 통한 번역과 언해는 당시 역관 계층들의 문자 생활의 면면이었고, 그 기능은 훈민정음이 담당했으며, 그 수혜자는 식자층을 포함한 백성 전체였다고 볼 수 있다.

 
2.2 유교와 문자 생활

16세기의 문자 생활도 조선 시대의 지배적 이념인 유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5세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중국의 「소학집성」을 바탕으로 한 언해가 1518년(중종 13년)에 이루어졌다. 그것이 「번역소학」이다. 이 책 발문에 의하면 ‘인쇄하고 널리 유포하여 아동이나 부녀자들에게도 그 내용을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라고 한 데서 유교의 이념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번역소학」을 전체적으로 의역을 한 것도 이런 의도의 표명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중을 위한 의역이 비판을 받게 되고 1588년(선조 19년)에 간행된 「소학언해」에서는 직역을 원칙으로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 두 문헌의 번역 양상에서 우리는 당시 문자 생활의 두 측면을 보게 된다. 무릇 유교의 이념과 가치를 전파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은 백성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그 백성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을 하면서 쉽게 이해시키려는 번역을 시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직역의 번역 방식을 고수하여 상대적으로 대중의 눈높이를 무시한 시도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의 번역 문자 생활의 양상은 이러한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3 간찰(簡札)과 문자생활
언중이 직접 관여하는 문자 생활이라고 하면 당연히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편지글일 것이다. 한글로 된 일기 따위가 조선 전기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면 이러한 편지글 형식의 간찰은 언중들의 문자 생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다. 16세기 간찰로 순천 김씨 간찰을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은 선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간찰의 내용을 살펴보면 16세기 생활과 관련된 용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주로 부부, 모녀, 부녀, 남매 사이에 오고간 글로서 살아있는 당시의 언어라 할 수 있겠다. 중세 국어 후기의 자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연철의 표기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실용문의 성격을 지니는 자료로 파악해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개인 간의 간찰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미 그 사이에 일반 백성들을 중심의 언중들 사이에서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간찰은 인쇄된 문헌이 아닌 이유 등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간찰의 존재는 훈민정음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문자 생활은 당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백성들의 의사 소통을 위해서 그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신문자에 기초한 문자 생활은 16세기를 기점으로 대중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2.4 15․16세기 문예문과 문자 생활
조선의 통치 이념과 정체성을 알리고 백성을 교화하려는 수단으로 신문자가 기능하기도 했고, 불경을 통해서 투영된 전래의 종교적 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신문자가 기능을 하기도 했지만, 15세기는 문예문의 번역 수단으로 신문자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문자 생활에서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양상으로 대표적인 문헌이 두시언해다.
두시언해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그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로 1481년(성종 12년)에 간행되었다. 권두에 실린 조위의 서문에 따르면 이 문헌 역시 간행 목적이 세상을 교화하려는 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경언해가 주로 간행된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문자생활사에서 두시언해는 문예문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많은 고유어가 번역 과정에서 풍부하게 실려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초간본은 임진왜란 이전, 중간본은 1632년(인조 10년)에 간행되어 두 문헌 사이의 언어 변화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당시 문자 생활의 입장에서 한시를 번역한 언해문을 향유한 계층이 누구였는가를 짐작하기 쉽지는 않으나, 한문으로 된 한시 자체는 양반층이 즐겼을 것이고,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 문헌은 양반뿐만이 아니라, 우리말을 아는 백성들이라면 역시 이 문예문을 읽고 음미했을 것이다. 세상을 교화하려는 목적에서 언해된 것인 만큼 그 향유층이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문자 생활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조선 전기에 문예문을 번역하는 수단으로 훈민정음이 이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의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려가요 가사는 문예문이지만, 주로 그 향유층이 일반 백성들로 알려져 있다. 노래 자체의 지은이도 미상일뿐더러 궁중의 음악과 그 노랫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시대부터 구전으로 전래하는 민중들의 노랫말이 문자로 정착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백성들이 남녀 간의 사랑, 민중들의 삶과 관련된 주제를 솔직하고 대담하게 옮겨놓은 것으로 백성들은 때로는 귀로 전해들은 이 고려가요를 문자 없이도 익혔겠으나, 그들의 음악과 그 노랫말을 문자를 통해서 익혔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것은 대중들의 문예 생활 속에 문자로서의 훈민정음이 기여한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초의 ‘가사’로 알려진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 성종 연간에 지어져 불리면서 문예문의 문자 생활에서 그 향유층이 일반 백성만이 아닌 양반들도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16세기에 오면서 그 절정은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의 작품으로 탄생했으며, 수많은 시조들이 이 시대 문예문 중심의 문자 생활에 기여한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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