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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후기(17,18,19세기)의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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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가 지나고 커다란 양대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사회는 그 이념과 가치 지향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였다. 성리학이 관념화되면서
중국 명(明)에서 양명학(陽明學)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경제의 시대적 변동과 민족적
자아의식의 싹이 튼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러한 변화의 절정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일어난 실학이었다. 후기로 가면서 청의 고증학과 서학(천주교)의 유입은 조선
후기 사회를 더욱 자극하였고 그것은 조선학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문자 생활은 조선식 운서 편찬 및 사서 편찬, 계층을 초월하여
그 주체가 된 언간을 통한 문자 생활, 민중들이 주체가 된 정음 문학의 발달과
문자 생활 등에 집중된다. 조선 전기(중세 국어)와 달리 더 이상 문헌에서
등장하지 않는 문자들이 생기면서 표기와 관련된 문자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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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조선식 운서와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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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는 한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운서의 필요성과 맞닿아 있었으며, 여전히 전래의 운서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에서 더 이상 관념적인 운서에 집착할 수 없었다.
바로 조선 한자음의 실정에 맞는 운서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선 전기 훈민정음이 운서에서 한자음 발음 기호의 역할을 했듯이 조선 후기의
조선식 운서에서도 훈민정음은 발음 기호의 역할을 담당했다.
박성원의 「화동정음」(1747)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운서였다.
이 문헌은 고려 이래로 전래하는 「증보삼운통고」에 중국 한자음에 해당하는
화음과 조선 한자음에 해당하는 동음을 병기한 것이다. 그 의의를 평가 받은
탓인지 1787년(정조 11년)에는 정조의 어제서를 얹어 내각에서 간행되기도
하여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홍계희의 「삼운성휘」(1746)는 「화동정음」과 마찬가지로 「삼운통고」에
화음과 동음을 함께 표기했으나, 같은 운의 한자를 가나다식으로 배열하여
조선식 운서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권두의 <언자도>
28자는 주목할 만한 도형인데, 여기에 ‘ㅿ, ㅇ’를 뺀 ‘초성독용육자’와
처음으로 등장한 ‘합중성이자’ ‘ㅘ, ㅝ’ 및 ‘중중성일자 ‘ㅣ’가 등장한
것이다. 합중성 ‘ㅘ, ㅝ’와 중중성 ‘딴이’는 그가 말한 대로 당시의
속용을 반영한 것으로 반절표에도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운서는 전통적인
중국식 운서와 차별되는 것으로 현실음을 반영한 운서로 그 의의를 지닌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도 운서가 간행되어 한자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이용되었으나,
식자층의 문자 생활을 위한 운서의 편찬이 그 이전 시대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게 만들어졌고, 그 한자음의 발음을 그 현실음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이 담당했다는 점에서 운서를 통한 문자 생활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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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자 습득을 위한 반절표와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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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조선 전기에 한자 교육을 위해 언문을 익히기 위해 「훈몽자회」에서
‘언문자모’의 내용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자 생활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한자음 및 한자 교육을 위한, 종속적 측면의 훈민정음
습득이라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우리글을 읽고 쓰기 위한 훈민정음
습득과 관련된 문자 생활의 흔적이 있었다. 그것이 반절표이다.
이러한 반절표는 <훈몽자회> 범례의 ‘언문자모’에 등장하는 ‘초중성합용작자례’에서
유래한 것이나,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일본 이리에(入江萬通) 등의 <화한창화집(和韓唱和集)>
권하에 수록된 일본통신사 장응두가 1719년(숙종 45년) 9월 일인(日人)에게
써 주었다고 하는 조선 언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비슷한 양식의 반절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나, 1869년에 간행된
불서 「일용작법(日用作法)」에 기록된 언본(諺本)은 좀 다르다. 1889년에 간행된
<신간반절> 1장도 이와 같은 종류이나, 신간 이전의 구판이
따로 있어 그 연대는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초보자들의
문자 학습을 교육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고안한 실례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 반절의 행마다 글자의 자습을 위해 한자가 적혀 있고, 한자
대신에 그림을 그려 놓아 그 익힘이 쉽도록 한 것이 흥미롭다. 가령, 언본은
‘可’자를 보고 ‘가’행을, 반절은 그림 ‘개’를 보고 ‘가’행을 익히도록
한 것과 같다. 따라서 당시 문자 생활에서 이 반절표는 유용한 도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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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언간과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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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쓰인 한글 편지를 흔히 '언간(諺簡)' 혹은 ‘내간(內簡)’으로
부른다. 한문에 대응하는 '언문(諺文)'이라는 문자로 이루어진 편지글인 셈이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많은 언간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문자 생활에서 주목할
것은 그 언간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남성이 아니라는 점이며, 한쪽은 반드시
여성이라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의 서간은 한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문 서간이 사대부 계층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면 언간은 특정 계층에 관계없이
남녀 모두의 것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내간‘이라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편지글이 그러하듯이 조선 전기에 나타난 간찰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은 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일상의 생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서사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언간을 통해서 본 문자 생활은 ‘언해’
중심의 번역투 우리글이 아니라 구어를 그 표기로 반영한 당대의 살아있는 언어생활의
면모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후기의 언간은 왕실부터 민중에 이르는 문자
생활의 양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아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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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평민 문학과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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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료 체제는 조선 후기에도 큰 변동이 없었고 따라서 사대부의 절대적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한자, 한문을 통한 식자층의 문학이 이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으나 한편으로 가집(歌集)의 편찬, 방각본(坊刻本)의 형성, 평민시단의
형성 등은 조선 후기 문예문을 통한 문자 생활의 결과였다. 이것은 평민들이
문학권 안에서 자신들의 문자로 문학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을 의미했다.
시조는 평민 가인들의 등장으로 그 저변을 넓혀갔으니 사대부와 기녀들의 문학이었던
시조는 그 주도권이 중인이나 평민으로 옮겨졌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설시조가
등장함으로써 시조의 형식을 파괴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언문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만 근대 문학 이후에도
'단가'는 시조 장르로서 오래 살아 남았지만, 사설시조인 '장가(長歌)'는
신시의 등장으로 사라지는 운명이었다. 당시 언문을 이용한 문학적 장르는 운문만이
아니었다. 산문의 경우 <구운몽>과 같은 소설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김만중이라는 인물이 바라본 언문관의 투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출판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출판되는 것은 대개 관판(官板)이고 대부분
선인의 문집들이었다. 그런데 사대부의 수가 늘었고 수요가 많아지자 이것이 상인의
손에 의하여 계승되어, 17세기 병자호란 뒤에는 상인들에 의하여 간행되는 방각본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각본 중에서 국문소설이 판각되기는 19세기 초엽에
들어서서부터이다. 홍길동전, 조웅전, 유충렬전, 토생전, 숙영낭자전, 사씨남정기,
전우치전, 장화홍련전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일반 민중 사이에 독자의
저변을 넓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 또한 언문 중심의 문자 생활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판소리계 소설 등의 등장은 또한 음악과 문학의 만남 과정을 통해 문자 생활
속의 한 장르로 정착된 것이었는데, 이 판소리계 소설은 국민 문학으로 크게
성장하여 그 바톤을 신소설에게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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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한문과 언문의 지위 교체와 문자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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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자 생활은 그 말기로 오면서 한자의 위축과 언문의 득세로
인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그 변화의 조짐을 예견한 사람은 이사질(李思質)의 아들인
이규상(李圭象)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는 그의 글 <일몽고(一夢稿)>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각국의 언서는 음에 속하는 반면에 예부터 만들어져 전해오는 한문은 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각국의 과문 또한 음에 속하지만 옛사람들의 의리문은
양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최근에 諺文과 과문은 도처에서 신장하는 데 반해
고자, 고문은 도처에서 점차 위축되고 있다. 동방의 한 지역을 두고 매일
그 소장의 형세를 관찰 해 보건대 오래지 않아 諺文이 이 지역 내에서 공행문자가
될 것 같다. 지금 더러 諺文으로 사용되는 공문서가 있는데 졸지에 쓰기
어려운 공이문자(공문서 작성에 사용되는 이두문)의 경우 간간이 諺文으로써
급한 형편에 대처하는 수가 없지 않다고 한다, 이것이 그 조짐이다. 물물사사
각각의 물과 일 어느 하나도 음이 이기지 않는 것이 없다.”
이규상은 예부터 전해오는 한자를 양에 속하는 것으로, 각국의 언서를 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언문의 쓰임이 우리나라에서 활발함을
지적하며, 조만간 그 언문이 이 지역의 공행 문자가 될 것 같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한자(한문)의 위축과 언문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행문자의 의미는 곧 공용 문자의 의미이고 공용 문자라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문자라는 점에서 그의 의식은 대단히 근대 지향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규상의 문자 의식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이규상이 당시의 문자 생활의 상황을 경험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한문 본위의 同文主義나 현실적 한문주의의 경향이 점차 세력을
잃고 있으며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언문이 이제 빈번하게 쓰이고 있음을 그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한 현실적 의식을 떠나 우리나라의 공용
문자가 한문이 아닌 언문이 될 것이라는 근대지향적 문자 생활의 양상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한문 중심의 문자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언문의 신장이요, 언문이 국문으로 그
지위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미래 문자 생활에 대한 예견이었다. 그것은 현실로
다가오고 우리의 문자 생활은 갑오경장을 맞이하고 근대계몽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변모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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