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면 > 한글의 탄생과 역사 > 문자 생활사 > 훈민정음 창제 이전

훈민정음 창제 이전

1 2 3 4 5 6 7 8 9

고려시대의 이두 자료들은 불상과 석탑 등 각종의 조성기(造成記)와 행정문서들로 주로 실용문(實用文)에 이두가 쓰였음을 준다. 이 시대의 이두문은 행정문서로서 그 표현 양식이 확립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초기에는 신라시대에 쓰던 이두문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다가 성종 6년(987)에 와서 공문서 양식을 상정(詳定)하도록 하였는데 이 이후부터는 이두문 양식도 일정한 문서의 규식(規式)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이두문은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서 자료가 부족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와는 차이를 보인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남아 있는 이두 자료의 성격을 검토해 보고, 조선시대의 이두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두문의 사용범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까지는 이두문이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이두문은 문체상으로는 한문의 영향을 받아 후기에 가면 한문에다가 구결의 토를 단 것과 같은 이두문이 많이 쓰이게 된다. 조선 초기의 이두로 중요한 것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1395년)와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1415년) 등이다. 이들은 백성들이 실생활에서 필요한 책을 이두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외에는 주로 문서에서 이두문이 쓰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신녹권(功臣錄券) 등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로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하나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인 상언류(上言類)ㆍ 정사류(呈辭類)ㆍ 장계류(狀啓類) 등도 이두문으로 쓰였다. 관과 관 사이에 주고 받는 첩정문(牒呈文)관문(關文)단자(單子), 형조에서 작성하는 문서인 추안(推案)이나 근각(根脚), 민간에서 관에 올리는 원정류(原情類)ㆍ 소지, 이에 대한 관의 판결하여 내리는 지령인 제사(題辭) 등도 이두문으로 작성되었다. 백성들 상호 간에 주고받는 문권류(文券類)인 명문(明文)성급문(成給文)화회문기ㆍ 유서(遺書) 등과 고목류(告目類)ㆍ 절목(節目)ㆍ 단자류(單子類) 등도 이두문으로 작성된 것이다. 조선 전기의 이두 자료는 고려시대보다는 많은 편이다. 조선 초기의 고문서에도 이두는 널리 쓰였다.

현재 전하는 것 중 중요한 것만 몇 개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초기이두자료
 
이 외에도 많은 이두 문서들이 남아 있다. 자료의 양에서는 조선시대의 이두 자료들이 그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이두가 사용된 영역은 축소되었다. 실제로 각종 문서 등에서 이두문으로 쓰던 것을 조선시대에 들어 오면서 한문으로 대체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두의 영역이 한글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이두 학습서도 많이 편찬ㆍ간행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658년(효종 9)에 간행된 편자 미상의 목판본인 『이문(吏文)』『이문대사(吏文大師)』, 『이문잡례(吏文?例)』(편자, 연대 미상으로 18세기 이후의 책으로 추정, 한글로 독법을 보인 이두는 약 190항이나 이중 20항 정도는 중복됨, ‘이토(吏吐)’라는 명칭을 쓰고 있음), 『전율통보(典律通補)』 초고본(初稿本)의 <이문(吏文)>, 『전율통보(典律通補)』 수정본의 <이문(吏文)>, 『고금석림(古今釋林)』의 <나려이두(羅麗吏讀)>, 『이두편람(吏讀便覽)』 (현재 사본(寫本)만 전함. 吏讀 330항), 『재물보(才物譜)』의 <이두(里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어록변증설부록(語錄辨證說附錄)>, 『유서필지儒胥必知』의 <이두휘편(吏頭彙編)>, 『주해어록총람(註解語錄總覽)』의 <이문어록(吏文語錄)>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이두집해(吏讀集解)』, 『아동이두(我東吏讀)』와 각종 어록해(語錄解) 뒤에 부록으로 실린 이두 자료집이 있다.

 
1 2 3 4 5 6 7 8 9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