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광종 때인 10세기
중반에 지은 것이므로 고려시대 초기의 국어를 반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한 작가에
의하여 동시에 지어진 작품이므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합한 『삼국유사』의 향가보다는
훨씬 일관성이 있다. 또
최행귀(崔行歸)의
한역시(漢譯詩)가 붙어 있고 40권본(卷本)
『화엄경(華嚴經)』에 바탕을 둔 노래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확실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노래도 지어진 지 100여 년 후인 1075년에
혁련정(赫連挺)이 편찬한 『균여전(均如傳)』에 실려 전하던 것을 13세기 중엽의
승려인 천기(天其)가 간행한 대장경 속에 수록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원전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외에 고려시대의 향가로 전하는 것에는 예종(睿宗)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다.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년)에 지은 것이지만 1636년의
간기(刊記)를 가진 『평산신씨세보(平山申氏世譜)』에 실린 ‘太師開國壯節
行狀 및 跋(태사개국장절 행장 및 발)’에 실려 전한다. 신흠(申欽)의 발(跋)에 의하면 이 행장은
임진왜란 전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나 난으로 인하여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을
후손이 수습한 것이라 한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표기법이나 언어 사실은
12세기의 것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전승과정에서 일어난 잘못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지었다고
하는 <승원가(僧元歌)>가 있다. 차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완전히
표기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 문자화되었고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고려시대의 국어자료로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차자표기 자료에 신득청(申得淸)이 지었다고 하는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가
있다. 역시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향찰이
18세기 이후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