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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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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찰
   
4.1. 향찰 자료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향가 14수이다.
   
향찰 자료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의 언어가 어느 시대의 언어인가를 고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 노래들이 지어진 시대는 작품에 따라 각기 다르다. 멀리는 삼국시대인 진평왕 때부터 가까이는 9세기 후반 헌강왕 때까지 걸친 것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향가는 작품이 이루어진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13세기 후반 『삼국유사』가 저술된 때에 와서야 문자로 정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이 신라시대의 언어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이 작품을 문자화한 일연(一然)이 이 노래의 내용을 이해하고 『삼국유사』에 실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유사』의 원간은 1310년대에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의 손으로 된 듯하나 전하는 책이 없고, 조선 초기에 간행된 중간본이 영본(零本)으로 전하며 완질(完帙)은 16세기의 중간본이 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향가의 본래 표기와 와전된 부분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로 잡을 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들 작품의 언어를 고대국어로 추정하는 데는 세심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향가들의 문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이 있다. 석독구결 등의 연구를 통하여 향가의 언어를 고증하면 많은 부분에서 새로운 해독이 가능할 것이다.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11수의 향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보현십원가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광종 때인 10세기 중반에 지은 것이므로 고려시대 초기의 국어를 반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한 작가에 의하여 동시에 지어진 작품이므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합한 『삼국유사』의 향가보다는 훨씬 일관성이 있다. 또 최행귀(崔行歸)의 한역시(漢譯詩)가 붙어 있고 40권본(卷本) 『화엄경(華嚴經)』에 바탕을 둔 노래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확실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노래도 지어진 지 100여 년 후인 1075년에 혁련정(赫連挺)이 편찬한 『균여전(均如傳)』에 실려 전하던 것을 13세기 중엽의 승려인 천기(天其)가 간행한 대장경 속에 수록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원전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외에 고려시대의 향가로 전하는 것에는 예종(睿宗)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다.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년)에 지은 것이지만 1636년의 간기(刊記)를 가진 『평산신씨세보(平山申氏世譜)』에 실린 ‘太師開國壯節 行狀 및 跋(태사개국장절 행장 및 발)’에 실려 전한다. 신흠(申欽)의 발(跋)에 의하면 이 행장은 임진왜란 전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나 난으로 인하여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을 후손이 수습한 것이라 한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표기법이나 언어 사실은 12세기의 것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전승과정에서 일어난 잘못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지었다고 하는 <승원가(僧元歌)>가 있다. 차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완전히 표기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 문자화되었고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고려시대의 국어자료로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차자표기 자료에 신득청(申得淸)이 지었다고 하는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가 있다. 역시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향찰이 18세기 이후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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