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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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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반절표의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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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반절표는 언제, 누가 만들어 보급하였을까. 그것을 밝혀주는 기록,
특히 처음으로 만든 사람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사용된 사실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기록만 존재하고 있다. 먼저 1751년(영조 27)의 『삼운성휘』
권두의 언자(諺字) 초중종성지도(初中終聲之圖) (사진 4 참조)를 들 수 있다.
모두 5단으로 된 이 도표는 위 3단에 초종성통용(初終聲通用) 8자, 초성독용(初聲獨用)
6자, 중성 11자가 있다. 이들 자모의 분류는 『훈몽자회』의 언문자모 그것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자모의 수효와 순서는 도표의 주석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간의 반절표를
따랐다. 그리하여 초성 ‘ㅌ, ㅋ’의 순서가 『일용작법』의 언본 과 같다.
그러나 ‘ ’이 ‘ㅣ’와 ‘ㅇ’으로 분석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반절표가
그러하였는지, 해례본 예의(例義)와 언문자모를 알고 있던 것이 분명한 편자
홍계희(洪啓禧)가 당시에 유포되던 반절표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훈민정음』에는 또 ‘ㅇ, ㆆ, ㅿ’의 초성 3자가 있으나 싣지 않는다는 주석에
미루어서 당시의 반절표가 그와 같았다고 추측된다. 도표의 아래 2단에는 합중성(合中聲)
2자로 ‘ㅘ, ㅝ’와 중중성(重中聲) 1자로 ‘ㅣ’가 수록되었다. 민간에서
중성 둘을 합하여 ‘ㅘ, ㅝ’로 하기 때문에 아래에 합중성이라 하여 붙이고,
또 ‘횡, 색’과 같이 본중성(本中聲) ‘ㅗ, ㅏ’ 외에 ‘ㅣ’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글자의 ‘ㅣ’는 본중성으로 쓰이는 ‘침(侵)’의 ‘ㅣ’와 다르므로 중중성이라
하여 아래에 붙인다고 주석하였다. 이로 보면, ‘과, 궈’ 행은 18세기 후반의
반절표에도 존재하였음을 알게 한다. 중중성은 ‘ ’의 잘못 분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서 당시의 반절표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대에 이른바 ‘딴 ㅣ’의 기원이 홍계희의 중중성에 대한 위 주석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은 주목된다. 다음으로는 『훈몽자회』의 언문자모가 있다.
민간에서 이르는 반절 27자(俗所謂 反切二十七字)란 주석의 반절이란 이름과
그 내용이 반절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다만 거기에는
많은 설명이 있어서 반절표와는 큰 거리가 있다. 이들 설명은 최세진이 범례(凡例)
에서 언문자모를 짓는다고 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자인 그로서는
한 장의 표로써 한글을 가르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여, 민간의 반절표를 바탕으로
하여 설명을 덧붙여서 반듯한 교재로 만든 것이 언문자모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마치 반절표를 바탕으로 하여 홍계희가 홍무정운(洪武正韻) 자모지도(字母之圖)
와 같은 언자 초중종성지도 를 만든 것과 같다. 언문자모는 홍계희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서 되었으므로 초성의 수효가 『훈민정음』에 가까운 점도 다르다. 그러나
중성의 순서와 초중성이 합용되어 글자를 이룬다고 한 예인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는 후대의 반절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반절표와 같은
존재는 이 언문자모로써 이미 16세기 20년대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 , ’의 폐기로 후대의 반절표는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이 언문자모가
1569년(선조 2) 안심사(安心寺) 간행의 『진언집(眞言集)』에 언본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실려 있고, 뒤의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사찰에서도 같은 반절표가 16세기 후반에 보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위의
추정을 더욱 뒷받침하는 일이다. 더욱이 1777년(정조 1) 만연사(萬淵寺)
중간의 『진언집』에서는 『삼운성휘』의 도표에 따라 수정된 내용의 언본이 실린
사실도 반절표와 언본의 깊은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절표
존재에 대한 그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지, 단정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에는 위 19세기 말의 반절표기나 그와 유사한 반절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일기인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는 주강(晝講)이 끝난 뒤 경연에 참여한
관원들 사이에서
첩운(疊韻)과
쌍성(雙聲)이
화제가 되었는데, 쌍성에 대하여는
요란한 말들이 난무하여 유희춘이 “심성(心性), 환희(歡喜), 방불(髣髴) 따위는
언문 2자가 한 행에 있으니 곧 쌍성이다” 하고 말하니 제자인 허봉(許篈)이
쌍성을 몰라서 매양 근심으로 삼았으나 이 설명으로 환히 알게 되었다면서 경탄하였다는
구절(1574년(선조 7) 3월 15일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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