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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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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글 보급의 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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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따지고 보면 15세기 후반까지는 중앙에서도 잘 보급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증거가 있다. 1464년(세조 10)에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등이 병환 중인 세조를 위하여 강원도
상원사(上院寺)를
중창할 때에 이를 돕기 위하여 세조가 물자를 보내면서 적은 문서와 신미 등이 이를 받고 만든 문서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이다.
이 문서는 왕자와 관료를 위하여 한문만으로 된 것과 왕비와 공주 및 외명부(外命婦)를
위하여 한문과 언해로 된 2부가 전한다. 그 문서를 보면 한문에는 1자의 잘못이나
수정이 없지만, 한글에는 상당한 수의 글자를 오려내고 교정한 곳이 있다.
또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36-147에 있는 악보(樂譜) 중 권 140-145에는
『용비어천가』가 실려 있다. 그 악보의 가사에 사용된 한자에는 오자가 전혀
없으나 한글에는 많은 오자가 나타난다. 오자에는 한글의 합자법(合字法)에 어긋나는
것도 있다. 가사를 베낀 사람이 한글을 제대로 알았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오자인 것이다.
이 악보가 1472년(성종 3)에 필사된 것이라고 하니 중앙의 한글 보급도
15세기 6, 70년대에 어떠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중앙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의 한글 보급이 잘 되지 못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되고도
남는다. 거기다가 16세기 전반에는 지방의 한글 보급이 미미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앞에서 말한 1527년의 『훈몽자회』 범례 의 한 조항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최세진은 시골에는 한글 모르는 이가 많으므로 언문자모를 지어 먼저 한글을 익히게
한 다음에 『훈몽자회』를 배우도록 하면 한자를 깨치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스승이 없이도 한자를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증언은 위에서 설명한 지방에서의 한글 보급이 잘 되지 않아서 한글 문헌의
지방판이 16세기 이후에야 편찬되고 간행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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