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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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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세기 중기에 들어서면 한글의 보급이 전국에 걸쳐 광범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명시적인 증거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상황 증거는
들 수 있다.
첫째로 창제 이후 1세기에 걸쳐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간행된 많은
한글 문헌이 있어서 널리 읽혔을 것이고, 둘째 한자와 한문의 학습에서 『훈몽자회』
범례의 한 조항에서 말한 이유로 한자와 유교 경전을 공부하기 위하여 먼저 한글을
배우고서 경서 언해를 읽었을 것이고, 셋째로 한글로 표기된 가사나 시조 등
국문학의 발달이 한글의 보급과 사용을 촉진하고, 넷째 이른바
언간(諺簡) 등으로
한글이 규방으로 깊숙이 파고든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
지난 1977년 봄 청주시 북일면(北一面)의 순천 김씨(順天金氏) 묘에서 나온
한 뭉치의 언간은 1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여성의 한글 편지 이용이
활발하였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16세기에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한글
문헌의 지방판이 중기 이후로는 전국 각처로 확대되어 다량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지방에서 편찬된 책도 있다.
그것은 광범한 한글 보급이 전국적으로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물론 이들은 상승작용을
하여 문헌의 간행이 한글 보급을 촉진하고 한글 보급이 더 많은 한글문헌의 간행을
불러 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이후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음에 틀림없다. 그 전
시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한글문헌이 전국에서 간행되었을 뿐 아니라,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필사본으로 훨씬 많이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문서를 한자로만 작성되던 관행이
깨어지고 한글이 문서에 사용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는 공적인 문자생활의 ‘문란’이라
할 일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숙종은 1675년(숙종 1)에 빚문서가
언문 곧 한글로 된 경우에는 증인이나 필집(筆執) 곧 문서작성자를 갖추지 못한
것(無證筆者)과 똑같이 관아에서 접수 심리하지 말라는 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당시 이두를 포함한 한자로 된 빚문서는 반드시 채무자, 증인과 문서작성자 3인의
수결(手決)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증인과 문서작성자는 채무자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한 증인이나 문서작성자의 수결이 없는 문서는 채권자가 허위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한글로 된 문서는 그 3인의
수결이 갖추어졌더라도 관아에서 빚문서로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 그 법령의 내용이다.
공적인 문자생활에 한글이 끼어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자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에 한글이 공적인 문자생활을 넘볼 정도로 널리 보급되고 사용되었음을
말한다. 실지로 한글로 작성된 17세기 후반 이래의 고문서가 도서관이나 사가(私家)에
꽤 전래되고 있다.
비록 한자와 같이 공적인 문자로 인정되지도 않고 법적인 보호를 받지도 못하였지만,
17세기에는 한글이 우리 문자생활에서 움직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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