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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최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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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4년(세종 26)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최만리는
극단적 사대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로 비난 받았으며 반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였다. 반면에 최만리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된
사람이며 한글 창제의 협력자인바 그를 사대주의자 내지 반민족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오해와 현대적 편견의 소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실록 등의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최만리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최만리를
대표로 하여 올린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에 담긴 구체적인 주장은 무엇이며
나아가 그 주장들의 근거는 어떠한 것인지, 세종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을 꺾기 위해 어떻게 조치하였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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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만리는
어떤사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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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만리의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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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崔萬理)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해동공자라 일컬어지는 최충(崔冲, 984-1068)의 12대손이며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 1188-1260)의
6대손이다. 또한 그의 외동딸이 본관이 덕수(德水)인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의석의 증손(曾孫)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이다.
즉 이이는 최만리의
외현손(外玄孫)이 된다.
최만리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19년(세종 1) 4월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것으로 보아 1390년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세종(1397-1450)보다 나이가
약간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한 최만리는 정9품인 정자(正字)라는
벼슬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수문전(修文殿),
집현전, 보문각(寶文閣)을
두었었는데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며 문신에게 관직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1420년(세종 2) 3월에 이르러 이 기관들 중 집현전만을 남겨 관사(官司)를
궁중에 설치하고, 다음의 표와 같이 직제를 정하였다. 아울러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해 집현전의 관리로 임명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다음해인 이 때 최만리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 임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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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문종(文宗)]가
조현(朝見)
할 때의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으로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
역시 같은 해 8월에 세종이 세자(世子)에게 전지하여 매일
주강(晝講)할 때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
우문학(右文學)
최만리가 번갈아 가며 고금의
유익한 말과 훌륭한 정치를 진술하고 민간의 일을 들려주기도 하며 저녁에 이르러서야
나가게 하는 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한 기록이 보이는바 이때 최만리는
집현전 응교로서 우문학을 겸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만리는 이후 수 년에 걸쳐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던 듯하다.
1431년(세종 13) 10월 기사에 세자가 시종(侍從)한 지 오래된 최만리와
박중림(朴仲林)이 들어와서 강(講)할 때는 스스럼없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묻는
데 비해 날마다 교대로 들어오는 나머지 관원들에 대해서는 낯선 까닭에 세자가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서연관을
겸관이 아닌
녹관으로
바꾸었는데 서연관은 녹관을 두어 오랫동안 그
임무만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최만리는 1432년(세종
14)부터 1435년(세종 17) 7월까지 세자
좌보덕(左輔德, 종3품)을
맡았는데 겸관이 아니므로 이 시기에는 집현전의 직책은 맡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이조(吏曹)에서 집현전의 기능이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하는 것인바 서연관의 직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별도의 녹관을
둘 필요가 없이 집현전에 합칠 것을 주청하니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최만리는
세자 좌보덕에서 집현전 직제학으로 소속이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으로
삼았다는 기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438년(세종 20) 7월에
집현전 부제학에 오르고, 이듬해인 1439년 6월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440년(세종 22) 7월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1444(세종 26)년에 상소문제로 사직하기 전까지 계속 집현전 부제학으로
남아 있었다. 사직하고 낙향한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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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엽 (성신여자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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