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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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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
앞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만리가 관직에 있었던 25년 간의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집현전에 소속되지 않았던 기간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던 1년 간과 세자의 서연관으로 겸직이 금지되었던 5년 간인데 이 중 세자의 서연관으로 있던 5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형식상으로만 집현전 소속이 아니었을 뿐 실제로는 집현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바 집현전이 새로 확장되던 때부터 붙박이로 근무한 최만리 또한 세종이 대단히 아끼는 신하였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주 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참조할 수 있다.

최만리는 술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씩은 마시지 마오.” 하였다. 이에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띄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 하니 옆에 있던 동료가 말하기를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큰 술잔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며 “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하고 바로 명하여 공관(工官)으로 하여금 큰 은 술잔을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이 최만리에게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세상사람들은 이곳을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千間墟)라 불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현(萬理峴)이라 불렀다.

최만리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듬해(144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만리가 가고 없는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항상 비워둔 채 언제나 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만리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대쪽같은 만리가... 결국은 죽었구나.” 하며 침식을 잊은 채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최만리의 집안에서 전해오는 것이므로 최만리를 높이기 위해 상당히 윤색되었을 것이기는 하나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첫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시 가승(家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은잔이 집현전[후에 홍문관]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과 중구 만리동2가 사이에 만리재[萬里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집이 있던 곳이라 한다. 현재는 ‘마을 리(里)’자를 쓰고 있는데 위의 이야기가 맞다면 와전된 것이라 하겠다. ‘만리동’이란 이름은 1946년에 일본식 지명을 고치며 ‘만리재’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초등학교 뒷산에 만리창(萬里倉) 터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최만리가 탁지부(度支部) 외창(外倉)을 남대문 밖 연산강(燕山江) 위에 처음으로 세웠으므로 그 창고 이름을 만리창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최만리가 호조의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는 믿을 수가 없다.

셋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최만리 이후 집현전 부제학의 임명이 1448년(세종 30) 5월에 가서야 이루어졌음을 참고할 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을 이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만리가 죽은 후 3년 후에야 집학전 부제학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이 최만리를 기다리기 위해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았다기보다는 부제학에 임명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최만리가 집현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컸었음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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