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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최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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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들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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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 따르면 최만리는 모두 14차례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3회의 상소는 일반 행정상의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6차례는
세종의 불사(佛事)와 관련하여 척불(斥佛)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중간에
이 척불 상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한 차례 올렸다. 이후 3회는
세자의 섭정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것들이다.
최만리와 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으나 세조실록에 보이는 기사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세조가 공신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다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문종이 세자였을 때, 서연관 최만리·박중림 등이
세자를 보익(輔翼)하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제 그대들은 한번도 선한 말을 진달(陳達)하여 세자(世子)를
경계한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첨(阿諂)함이 심하다 할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최만리는 문종이 스스럼 없이 대할 정도로 친했으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주
엄한 스승이었다 할 것이다. 세자의 스승인 최만리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신하된
당연한 도리이며 비단 최만리만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므로 그다지 특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최만리의 청렴성을 확인시켜
준다 할 것이다.
최만리가 마지막으로 올린 것이 바로 문제의 언문 창제 반대 상소이다.
『연려실기술』이나
『대동야승』에는
『필원잡기』의
기사를 인용하여 최만리가 환관의 복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되어 있는데 실록에 이러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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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와 세종의 처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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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의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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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20여 년을 근무하여 집현전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인 부제학을 맡고 있던 최만리는 왜 세종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하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일까 그것도 창제가 다 이루어진 후
2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는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1444년(세종
26) 2월 16일에 세종이 한글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실록에 실린 2월 16일 기사의 내용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1444년 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집현전 학사 중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와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강희안을 의사청(議事廳)에 나오도록 하여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 또 동궁[세자]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이 사업을 감독하여 관장하게 하였으나 모든 일은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으며 물자를 보급함에도 매우 우대하도록 하였다.
이상이 기사의 내용이다. 의사청이란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장소이고 『운회』는
앞서 밝혔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말한다.
이 기사 내용을 통하여 세종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자와 대군들이 감독하게 하고도
일일이 세종 자신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상도 후하게 주고 물자
공급도 우대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사에서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다[賞賜稠重]’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2월 16일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일을 잘하란 의미에서 상을 후하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상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일반적인
경우는 사업이 완료되고 나서 그에 따라 포상하는 법인바 이러한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이 부분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해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록 기사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실록의 기사는 날짜별로 기록되며 일반적으로 그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날 내지 상당 기간의 걸치는 사건임에도 하루치 기사에 몰아서
넣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해당 기사는 대개 사건이 시작된 날, 사건이
끝난 날에 실리게 되는데 간혹 사건이 진행 중인 중간 날에 실리기도 한다.
이는 실록이 왕의 사후 수 년 내지 수 십년 치의 기록을 모아 간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 역시 그 날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당 기간에 걸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뒤에서 살펴볼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즉 4일 뒤인 2월 20일에 올린 상소에서 최만리
등은 “옛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치고 근거도 없는
언문으로 음을 달아 공장(工匠) 수십 인을 불러들여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의 운서를 고쳤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이 가지는 특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인데 2월 16일에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면 불과 4일만에(실제로는
상소문을 준비하는 데 하루 내지 이틀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므로 명령이 내려진
직후일 것이다) 번역의 기본 방향이 잡히고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해야 한다. 더구나 새겨서 인쇄하여 반포하려 한다는 것은 이미
원고가 완성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할 것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는 이 때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이날 원고가 상당히 완성되었기에 불러 상을
내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은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아마 훈민정음의 창제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1443년 12월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약 2달의 기간이
걸려 원고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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