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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