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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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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크게 보면 ‘예의(例義)’와 ‘해례(解例)’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는 세종이 만들었고, 해례는 정인지를 비롯한 8명의 신하들(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이 만들었다. <세종실록> 권 113의 28년 9월조에는 이미 앞의 제1장에서 인용한 문장에 뒤이어 ‘어제왈(御製曰)’이라 하고 나서 예의 부분(세종의 서문과, 훈민정음의 음가 및 운용법에 대한 설명)을 기록하고 있어, 세종이 그것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글자 크기를 달리 하여, 임금이 작성한 부분은 큰 글자로, 신하들이 작성한 부분은 작은 글자로 새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예의가 14행에 매행(每行) 11자로 되고, 해례가 16행에 매행 13자로 되었다(정인지의 서문은 한 글자를 낮추어 적었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의와 해례에 면수[張次]가 각각 따로 매겨져 있으며 판심제(版心題)가 ‘정음(正音)’과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달리 달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 33장(張) 가운데 예의가 4장, 해례가 29장으로 되어 있는바, 예의가 4까지, 해례가 1부터 29까지 장차를 따로 매기고 판심의 제목을 달리 새겨 놓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의가 4a면에서 끝나고 나서 4b면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이유와, 해례가 시작할 때 1a면 맨 앞에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는 내제명(內題名)을 다시 갖추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체재상 예의와 해례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용비어천가 이러한 <훈민정음>의 체재는, 달리 말하자면 본문과 해설을 짝지워 놓은 체재라고 할 수 있다. <성리대전>이 북송 및 남송 시절에 이룩된 성리학의 업적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문으로 하고 그 각각에 대한 주석을 명나라 영락제 당대의 학자들이 붙인 체재로 되어 있듯이, <훈민정음>도 세종이 쓴 예의를 큰 글씨의 본문으로 하고 신하들이 쓴 해례를 작은 글씨로 하여 그에 대한 해설로 짝지워 놓은 체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과 해설의 체재는 <용비어천가>나 <월인석보>, 그리고 많은 불경언해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본문과 해설 부분이 서로 독립된 체재로 되어 있다는 점이 앞의 문헌들과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훈민정음>의 체재를, 더 세분하여 예의·해례·정인지서(鄭麟趾序)의 셋으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해례에서 정인지의 서문을 분리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3분 체재로 파악한 큰 이유는 <세종실록>에서 예의를 싣고 난 뒤에 이어서 ‘예조판서정인지서왈(禮曹判書鄭麟趾序曰)’이라 하고 나서 정인지의 서문을 따로 싣고 있어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독립된 부분인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책자의 체재상으로 볼 때나 내용상으로 볼 때,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에 대한 서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의 용자례(用字例)에 뒤이어 한 행의 비움도 없이 계속될 뿐 아니라, 장차가 연속해서 매겨져 있고 판심제가 동일하게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정인지의 서문을 실은 것은, 해례 전체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다 실을 수 없어 부득이 해례 부분을 대표할 수 있는 서문만을 실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훈민정음>의 체재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 예의
세종 서문 - 음가 · 운용법
해례
5해와 1례 - 정인지 서문
월인석보
이 가운데 예의 부분만이 15세기에 우리말로 번역[諺解 언해]되어 나왔다. <월인석보(月印釋譜)> 권 1·2의 맨 앞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 그것이다. 이것은 (1)의 예의에 중국음[漢音 한음]의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여 언해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훈민정음> 예의본이니, 국역본이니, 언해본이니 하고 불러 왔다.아마도 이 언해본은 <석보상절(釋譜詳節)> 권 1이 발견되어 나오면 그 맨 앞머리에도 실려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보상절>에 이미 치두음과 정치음(正齒音) 표기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전체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은 해례까지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이니, 원본(原本)이니 하고 부르기도 하고, 언해본이라는 명칭에 대비하여 한문본이라고 불러 오기도 한 것이다.

이 해례본은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굴되어 나온 책자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당시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기워 넣는 과정에서 상당한 실수가 저질러졌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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