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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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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397년(태조 6) 5월 15일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諱)는 도(祹),
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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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元正)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
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이
잡힌 시기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
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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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펼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하여 있었으므로 태종의 영향이
계속된 시기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룩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는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약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게 했는데,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 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개혁되는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고, 이 개혁을 기점으로 하여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하게 변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인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 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기반이 진전되었기
때문에 그 밖의 분야, 즉 제도와 문화적인 기반의 성립과 함께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안정적 기반 위에 세종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져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 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이 다양한 편찬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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