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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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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절감하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 의지를 세운 것도 이 즈음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세종 10년을 즈음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려는 의도가 발현하였음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하나 있다. 세종 10년에 진주의 김화라는 사람이 그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세종이 이 사실을 듣고 놀라면서 ‘세상 풍속이 박악하여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다.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이런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쳐 주고자 하니 집현전이 이를 주관하라’고 하셨다. 또 14년 음력 11월 7일 정사를 볼 때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법률을 알아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의 경중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 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여 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좌우 신하들에게 언급한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그 기록이다. 이처럼 세종은 우민을 교도하기 위하여 여러 방편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농사직설(農事直設)>, 삼강행실도 등에 그림을 그려 글보다 앞에 넣기도 하고 이두로 번역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도 세종이 생각하는 바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자, 우리말에 적합한 새 글자를 만들어 우민을 깨우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에 세종은 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선로, 이개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던 것이니, 이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대의 훈민정음 창제는 이 시대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통보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 이외에도 법전을 정비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을 비롯,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에 전통의 요소를 더한 뛰어난 기구들의 발명을 이끌었으며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또한 음악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으로 인해 이 시대는 우리 음악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가 되었으며, 금속화폐인 조선통보(朝鮮通寶)의 주조, 언문청(諺文廳)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사업 등이 펼쳐졌다.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기 때문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바탕은 바로 세종의 사람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문종, 제2자는 세조이다. 세종대왕은 1450년(세종 32년) 4월 8일 승하하였으며, 시호는 장헌(莊憲), 능의 이름은 영릉(英陵)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문화사대계 1.어학,문학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세종문화사대계 4.윤리, 교육, 철학, 종교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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